The Grey Race [Give It Love]
- Posted at 2008/08/16 00:00
- Filed under review/해외

Give It Love (2007/Unfiltered Records)
8.0
01. Stop Inside Your Start
02. Cracks
03. Try Not To Think
04. Jumping In
05. Goodbye To You
06. On The Chin
07. From Me To You
08. The Johnsons
09. Through Your Eyes
10. Straight For the Middle
11. Lights Out
+
이야기는 뉴질랜드에서 시작한다. 뉴플리머스(New Plymouth)에 존 달링(Jon Darling)이란 친구가 있었다. 바다에 접해있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해발 2,518m의 에그몬트산이 가까운 지역이다. 유년기의 환경은 인생관에 중요한 영향을 남기곤 한다. 이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이른바 전설적인 야구스타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엄밀히 따져보면 기량 면에서 그들보다 더 나은 후배 선수들이 계속 등장해왔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전설로 남는다. 역사의 유년기를 만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음악의 역사 역시 대개 그런 식이다. 존이 자란 집에 방이 몇 개였는지, 근처에 어떤 나무들이 자랐는지, 우스꽝스런 사건들은 얼마나 겪었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어쨌든 존이 이 섬나라에서 음악과 작곡에 눈을 떴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름부터 낭만적인 달링 집안에는 존 말고도 재능 있는 가족이 또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맬버른에서 댄서로 활동하다가 싱어송라이터의 길로 들어선 줄리아 달링(Julia Darling)이다. 그녀는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거리에서 노래했고, 레이블과 계약하여 스물두 살이던 1999년에 [Figure 8]을 발표한 뮤지션이다. (나이 계산 들어가시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 남매의 정이 깊었는지 줄리아는 훗날 남동생이 노래하는 밴드, 그레이 레이스(Grey Race)의 앨범에 목소리를 실어주기로 한다.
한편 저 멀리 뉴욕에는 제프 힐(Jeff Hill)이라는 뉴욕 토박이가 살고 있었다. 물론 그는 지금도 거기에 살고 있다. 제프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루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 밴드에서 활동하는 등 이름난 베이스 연주자이다. 또 다른 남자 에단 유뱅크스(Ethan Eubanks)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이리어에서 10년 동안 레코딩과 라이브 활동을 한 드럼 연주자였다. 모두 음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뮤지션들이라는 말씀이다. 특히 에단과 교분이 있었던 앤디 체이스(Andy Chase)는 훗날 그 친구가 열성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밴드, 역시 그레이 레이스의 앨범을 제작해준다. 남태평양의 뉴질랜드와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동부의 뉴욕, 이렇게 지구의 모서리들에 있던 세 남자가 뉴욕에서 하나의 '밴드'가 된 것이다. 복숭아밭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의기투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말하고 나니 뉴욕은 정말 멋진 도시처럼 보이지 않는가.
문학과 영화에서 과거의 상해가 매력적인 도시로 그려지는 것은 현재의 위상과 관련이 있다. <뉴욕, 뉴욕>은 물론이고,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앨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옴니버스 영화 <뉴욕스토리>를 포함하여 폴 오스터의 <뉴욕 삼부작>, 그리고 드라마에서마저 반복되는 이 뉴욕스토리들은 이 도시가 점한 현재의 위상과 무관하지 않다. 20세기 초반의 경성을 매력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들이 아직까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는 현재 서울의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여태 도시예찬을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미국에서 괜히 애착이 가는 지역은 사랑해마지 않는 아갈로크(Agalloch)로부터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오가는 다양한 장르의 훌륭한 음악인들과 줄줄이 연줄을 맺어온 오레곤주 포틀랜드이긴 하다.
++
동네 이야기로 빈둥거리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고 '비상구'를 타고 다시 브루클린으로. 제프의 침실에 세 남자가 모여 녹음을 시작한다. 이쯤 되면 그레이 레이스가 송라이터이자 보컬인 존의 것만이 아님을 눈치 채야 한다. 레이블과 연결시켜준 사람, 작업실로 자기 방을 내놓은 사람은 다른 멤버들이다. 레코딩에는 존이 기타를 연주해줬던 트레이시 본햄(Tracy Bonham)과 줄리아 달링(Julia Darling)도 참여한다. 기본적으로 홈레코딩이었지만 이 프로들이 짜놓은 사운드는 조금도 헐겁지 않으며, 다양한 악기를 통한 효과까지 세심하게 조율하여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세 남자와 친구들이 쏟은 노고의 결과물들이 2007년 여름에 낸 EP와 9월에 발표한 풀렝쓰 [Give It Love](2007/Unfiltered Records)이다.
<Stop Inside Your Start>가 제목과 달리 뜸들이지 않고 [Give It Love]로부터 바로 걸어 나온다. 부드러운 베이스가 깔리고 건반과 드럼이 찰랑인다. 매력적인 남녀 보컬의 하모니가 그 사이를 비집고 흐른다. 전형적인 밴드 사운드인가 싶더니 표정을 바꾸곤 내성적으로 기타를 어루만지는 소리가 이어지면서 <Jumping In>의 낮은 읊조림이 누군가의 방을 위로하듯 채워준다. 물론 이 모두는 동시에 일어난다. 벌써 원숙미를 풍기는 노래들과 요란한 소리들이 부딪히지 않는 편곡, 그리고 꼼꼼한 레코딩은 신인밴드에게 기대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를 수 있다. 어딘지 새로우면서 서툴거나, 서툴면서 매력적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이미 세 남자는 그 늙수그레한 얼굴들로 충분히 먹은 짬밥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밴드에서 저마다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서로를 도왔으리라는 점이다. 존은 에단과 제프의 경험과 역할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레이 레이스가 그랬다는 말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재능은 있으나 다듬을 필요가 있는 젊은 송라이터와 편곡과 음향에 대한 안목과 경험이 있는 멤버들이 만났을 때의 밴드음악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간혹 밴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작곡자만을 말할 때 답답해하곤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에단은 조율사의 역을 맡았고, 그의 표현을 빌면 "사랑스러운 존의 목소리"에 사운드를 입히며 음악적으로 보완해주었다. 존 역시 그레이 레이스를 "훌륭한 팀이며 진정한 공동체"라고 추켜세운다. 이렇게 서로를 인정함으로써 밴드에 대한 자신감을 은근히 내보이고 있다.
이제부터 얘기하려는 세 가지의 자연스러운 섞음은 이러한 조건에서 가능했다. <On The Chin>과 <From Me To You>에서 배드 핑거(Bad Finger)와 비틀스(The Beatles)를 언뜻 떠올린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음악을 듣다가 자주 비교의 유혹에 빠지지만 실제로는 무관한 경우가 없지 않다. 하지만 임의적인 나열이 아니라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다. 그렇게 한발 물러나더라도 그레이 레이스의 내부로부터 옛것의 향취가 스며 나온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레코딩된 포크와 팝을 듣다보면 곡의 좋고 나쁨을 떠나 그 시대의 바람과 냄새가 스민 분위기가 좋아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저마다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장르와 시대의 섞음이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그레이 레이스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인적 구성과 환경에서 태어났다.
낭만적인 <Try Not To Think>이나 <Through Your Eyes>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한다. '청승송'이라고 해도 될 듯한 슬픔과 체념 그리고 허무가 배어있음에도 단지 뻔한 청승에 머물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잃어버림, 그 잃어버린 경험은 음악이 될 때 빛나는 상처가 된다. 어릴 적엔 잔혹영화를 좋아하다가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은 무뎌져서라기보다는 실제가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되고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가 어떤 건지 알게 된 사람의 노래, 실제의 감정을 음악으로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체득한 노래는 그래서 다르다. 존이 확인시킨다. "내 감성은 어둡고 침울하지만 에단과 제프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정서적 조화는 개별적인 음악여정의 결과만이 아니라 세 남자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해야 공정하다. 이것이 두 번째다.
물론 <The Johnsons>처럼 어딘지 쓸쓸한 팝송이 있는가하면 베이스의 둥둥거림과 드러머의 어깨움직임이 보이는 듯한 <Goodbye to You>와 <Lights Out>이 함께 자리를 잡고 있다. 또 비브라폰을 들려주거나 현이 작은 귀를 타고 넘어 들어오는 노래들, 이를테면 <Cracks>와 <Straight from the Middle>은 세밀한 사운드 프로덕션의 결과물이다. 기본적인 형태의 밴드와 세련된 팝튠이 만나는 자리에 마치 갯벌에 남은 새의 발자국이나 눈 위의 고양이 발자국처럼 다채로운 악기와 소리들이 우아한 꽃문양마냥 찍혀 들어간다. 이 세 번째 섞음을 통하여 그레이 레이스는 태평양 건너의 한 노총각이 단골 펍에서 흰 종이에 신청 곡들로 이 앨범의 곡들을 적어내고는 뿌듯하게 DJ 형님과 다른 손님들의 반응을 기다려볼 계획을 미리 세워놓게 할 정도로 근사한 노래들을 한가득 담아냈다.
+++
도시의 거리에서 넥타이를 볼 때마다 괴상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처럼 쓸모없는 물건을 매고 다니다니…. 존 역시 스탠다드한 형태의 송라이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레이 레이스의 곡들은 정해진 공식을 따르기보다는 변화무쌍하게 흐른다, 라고 해야 존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아주 멋진 고집이다. 그런데 정말 그의 표현대로 "날 것"이라거나 "소음과 흠을 그대로 둔 불완전함"의 매력을 살리고 있는지에 대한 확답은 잠시 미뤄두고 싶다. 그것은 다소 성급한 처신이기 때문이다. 프로 뮤지션들답게 안정적이지만 조금은 지나치게 노련한 느낌도 없진 않다. 물론 이 앨범의 리스닝 포인트와도 관련이 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조합과 방향이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 앨범들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보고 이국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국적이라는 말은 단어 자체의 의미와 다른 어떤 느낌이다. 한마디로 멋지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위도에 따라 하늘의 높이마저 달라지고, 하물며 수화(手話)마저 다름에도 먼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더 먼 곳에서 듣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보편적인 튠의 존재는 벅차게 즐거운 일이다. 여기에서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확인하고픈 대목은 존의 목소리와 어쿠스틱 기타가 시종 곡을 이끌어간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쿠스틱이 갖는 매력은 흙과 나무와 돌과 종이로 지은 전통가옥의 아름다움과 비슷하다. 모든 걸 걷어내도 어쿠스틱 기타와 노래는 여전하게 들리게 될 송(Song)이 그레이 레이스의 미덕이다. 햇살이 직사각형으로 드러누운 거실 소파에 앉은 존이 한가로이 기타를 퉁기며 불러도 달라지지 않을 노래들….
어느 대도시, 창문으로 가끔 이파리들이 들어오는 방에 세 남자와 친구들이 둘러앉은 풍경을 상상해본다. 주체하기 힘든 에너지가 파멸로 이끌어버리는 예술가에 대한 편견이 재생산되어 왔다. 할리우드 어드벤처 영화들은 걸핏하면 발견하고, 파괴해버렸다. 물론 중심에 다가가면 감당할 수 없어 광기와 악수하게 되고, 때론 병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일까? 단언컨대 다수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았던 천재들이 더욱 많았다. 사람 좋게 생긴 세 남자의 젊음과 경험이 한데 엮인 음악은 그래서 사랑스럽고 아늑하다. 음악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중독이고, 어떤 식으로든 포기와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건 사랑과 너무 닮아있다. 그레이 레이스의 [Give It Love]는 짧지만은 않았을 자기네 삶을 '세 남자의 노래바구니'로 키워온 이들의 사랑이야기다. 이 순간, 이야기의 배경은 뉴욕 브루클린을 훌쩍 벗어난다. (나도원/보다)
※ 이 글은 비트볼 뮤직의 [Give It Love] 라이선스 앨범에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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