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날 (2008/Antenna Music)
4.6
01. 공원에서
02. 우리 만난 적 있나요
03. 밤의 멜로디
04. 즐거운 나의 하루
05. 그럴 때마다 (Instrumental Version)
06. 관계와 관계
07. 여름날
08. 에필로그
고등학교 때 친했던 몇몇 여자 친구들처럼 늦도록 그의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든지, 그의 새로운 음반을 책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무척이나 설렜다든지, 그런 정도는 분명 아니었지만- 하지만 여차저차 해서 그가 냈던 음반들은 거의 다 제 방 앨범 꽂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게 되었고 또한 가끔씩 꺼내듣게 되었답니다. 노래방에 예전처럼 가주 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갈 때마다 그가 쓴 곡을 한 곡 정도씩은 노래하고는 했고요. 진심으로 '베스트!'라 할 만한 음반은 없었지만 늘 어느 정도 이상은 해주는 뮤지션, 신뢰할 수 있는 뮤지션이었습니다, 토이는. 그와 그 주변 뮤지션들(속칭 고급가요 군-)의 노래들이 다소 과대평가 받는다는 입장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바였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마구 깎아내릴 필요도 없었어요. 적당히 트렌디하고 또 적당히 청승맞은 노래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미덕이란 게 별것 아니듯.
토이의 지난 음반, [Thank You]를 비교적 좋게 들었습니다. 아직- 딱 좋을 정도로 숙성되지는 않았다는 기분,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어요. 이미 조로했어도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없는 위치인데, 그의 고민이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온다는 점이 새삼 신선했지요. 조원선이 노래한 <Von Voyage>나 이규호가 부른 <나는 달>는 개중에서도 훌륭했고요. (이렇게 말하자면 그의 오랜 음악 경력이 조금 빛 바라겠지만) [Thank You]는 전형적인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음반이었답니다.
그리고 한참 매미가 여기저기 울어대는 여름, 그러니까 바로 요즘이지요. 소품집 [여름날]로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훨씬 '사적'인 음반의 성격을 강조하듯, 평소 쓰던 '토이'라는 이름이 아닌 본명으로 말이에요. 소품이라니, 성격 급하기 짝이 없어 긴 음악 듣기를 누구보다 힘들어하는 저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요. 그가 지금보다 덜 유명했을 때 발표되었던 몇몇 소품들이 아련- 하니 좋았음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조용한 기타와 피아노 소리, 단아한 멜로디언의 연주가 퍽이나 사근사근한 첫 곡, <공원에서>를 들을 때 까지도 이러한 감상은 유효했답니다.
하지만 그 다음 트랙인 <우리 만난 적 있나요>는 다소 맹숭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허밍이라든지, 기타든지, 피아노든지, 스트링이든지, 나쁠 것이야 없었지만 뭐랄까- 텐션(tension)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물 흐르듯- 고급스럽다, 는 느낌 외에는 뚜렷한 상이 떠오르지 않았지요. 그리고 갑작스레 툭! 치고 들어오는 <밤의 멜로디>, 개인적으로는 그 순간이 (심심한 진행 속에서) 가장 놀랍기도 했고, 또 음악도 가장 마음에 드는 축이었지만 그 '발랄한' 페퍼톤스(Peppertones) 특유의 스타일이란. 신재평의 어레인지는 이것이 유희열의 소품집에 있어도 될 음악인지, 아니면 페퍼톤스의 B-Side 쯤 될는지- 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답니다. <그럴 때마다 (Instrumental Version)>는 너무 '뻔'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고 하림과 지누가 도운 <관계와 관계>는 모티브를 잃어 위태위태했지요(또한 지루했답니다). 페퍼톤스의 싱글이라 해도 열에 아홉은 깜박 넘어갈 <밤의 멜로디>보다는 그래도 유희열 특유의 멜로디 감각이 잘 녹아든 표제곡 <여름날>의 싱그러운 연주를 듣고서야 아- 그래도 유희열은 유희열! 이라며 조금 안도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거의 마지막 트랙이었다는 것. <에필로그>는 짧고, 단호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지요. 애걔, 설마? 라면서 몇 번이나 되돌려들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를 것 없었습니다.
저는 조금 우울해졌어요. 뭐야, 이게. [Thank You]를 들으며 중견 뮤지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점쳤던 제가 오히려 한심했는걸요. 최소한 [여름날]에서는, 음악에 대해 진지한 모색을 거듭하던 (아직 젋은) 뮤지션 토이의 모습을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물론 '나쁠 것 없다'는 점에서야 웰-메이드라 할 만 했지요. 세련미라든지, 단아함이라든지, 유희열은 그런 형식미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Instrumental Version)>의 교본 같은 진부한 연주를 들으면서- 이런 형식미, 기술적인 측면을 빼놓는다면 과연 남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자신할 수 없었지요. 유희열이라는 브랜드 파워를 탁- 떼어 놓았을 때 과연 남는 것이 무엇일까? 저는 그 질문에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답니다. 최소한 [여름날]에서, 저는 살짝 씁쓰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아마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여름날]에 수록된 몇몇 트랙들이 울리고 있을 겁니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유희열의 새로운 소품들이 적당히 세련된 감성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시간이 흐른 뒤를 두고 보는 거예요. '참 오랜 시간이었지'라 이야기 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긴 생명력을 유지할 음악들이 될 수 있을지. 저는 'No'에 한 표. 오래 가기에는 너무나 헐벗은 아이디어들. 그들에게 주어진 생이란, 아마 길지 않을 것. 저라면 차라리 미련 없이 그의 '다음'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는 걸요. 그는 지금까지의 바이오그래피들을 통하여, 몸소 그의 능력을 증명해왔으니까요. (단편선/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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