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필순&함춘호 [그는 항상 내 안에 있네]
- Posted at 2009/05/23 00:00
- Filed under review/국내

그는 항상 내 안에 있네 (2009/Sinis)
7.4
01. 이제서야 알게 된 것 하나
02. 조금 알 것 같아요
03. 행복하지 않은지
04. 푸른 밤을 여행하다
05. 그는 항상 내 안에 있네
06. 당신 생각하면
07. 아이들에게
08. 꿈
09. 길
10. 이곳엔 아무것도
장필순을 듣는다. 온전히 빼어난 보컬리스트였다가 5집과 6집을 통해 불멸의 아티스트로 비상한 그녀를 함춘호와 함께 듣는다. 하덕규와 더불어 시인과 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모던포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그가 장필순과 함께 한 새 음악을 듣는다. 일러 거장의 만남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조합, 장필순은 늘 함께 해오던 조동익 대신 함춘호와 함께 이전의 앨범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이 앨범은 CCM 앨범이다.
장필순에게 6집 이후 새 앨범이 언제쯤 나오는지 물었을 때 가스펠 음악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예고한 것처럼 함춘호와 함께 CCM 앨범을 내놓은 것이다. 사실 한국 대중음악시장에서 거의 대중음악 음반 시장 규모에 맞먹을 정도라는 CCM 음악은 완전히 다른 종교 음악의 세계이다. 음악의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내재적 관점에서 CCM 음악이 어떤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알지 못하는 탓에 장필순과 함춘호의 신작을 CCM 음악의 관점에서 논하는 것은 능력 밖의 일이다. 민중가요와 마찬가지로 도저한 신념의 음악인 CCM 음악을 그 세계관의 차원에서 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수박으로 겉핥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리뷰는 비개신교 신자의 인상기가 될 수밖에 없음을 미리 고백하기로 한다.
하지만 다행히 이 앨범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CCM 음악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어 보인다. 절대자 주님에 대한 지극한 경배와 찬양이 절절하게 담겨있는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CCM임에 반해 이 앨범에는 주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고 당신이나 그, 빛 정도로 표현될 뿐이다. 게다가 앨범 수록곡 10곡 가운데 당신이나 그, 빛이라는 명사를 통해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곡은 5곡뿐이다. 그 5곡에서도 그녀는 여타의 CCM처럼 직접적으로 들떠 하나님을 찬미하기보다는 그저 그로 이룬 변화를 넌지시 고백하고 나지막하게 감사를 전할 뿐이다. 1990년대 이후 CCM이 대부분 이렇게 변화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 앨범은 CCM 앨범이기도 하지만 윤항기, 조하문, 하덕규처럼 완전한 CCM 뮤지션이 되어버린 증거물이 아니라 장필순의 종교적 체험과 종교적 체험으로 촉발된 그녀의 인생론이라고 보아야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가사와 곡을 장필순이 직접 써 낸 이 앨범에서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며 깨달은 여러 가지 성찰과 감상을 두루 기록하고 있다. '이 세상에 잠시 머물러 있을 뿐 내 것은 없는 거'라는 인식과 '어느 누구도 누구를 미워할 순 없'다는 관용이 그녀의 종교적 성찰을 반증하고 '그는 항상 내 안에 있'다는 것이 그녀의 종교적 감사를 드러낸다면 <푸른 밤을 여행하다>는 여행의 기록이고,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은 여전한 그녀의 인간적 번뇌를 드러내는 기록인 것이다.
이처럼 CCM이라는 이름으로 단일화할 수만은 없는 그녀의 고백을 가장 잘 이끌어나가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자신과 동료들이 직접 쓴 노랫말과 멜로디를 이끌고 예의 그 부드럽고 섬세한 보컬로 흘러간다. 당대 최고의 보컬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녀의 보컬은 강하게 내지르거나 소리를 비틀기보다는 그저 사람의 목소리임을 인식시켜주는 단순함으로 일체의 수식과 가장을 육탈(肉脫)하고 다만 완급을 조절하며 나아간다. 자신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극한 원숙함으로 진정해 보이는 깊이에 도달하는 그녀의 보컬은 이 앨범의 어느 연주와 사운드보다 더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만약 같은 곡을 다른 이들이 불렀다면 밋밋해질 수 있었을 곡들조차도 그녀는 장필순 자신의 아우라로 확실히 장악하며 우리를 감동으로 눈감게 한다. 이 앨범에서 상대적으로 와 닿는 곡들은 대부분 연주보다는 그녀의 보컬을 더욱 부각시킨 비트 없는 곡들이며 인간적 번뇌를 드러낸 곡들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함춘호를 위시로 한 일군의 세션들은 예의 단정하고 깔끔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포크나 포크 록의 자장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음악은 사실 장필순이 이제껏 해왔던 음악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대부분 이전 장필순 앨범의 어느 곡에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사운드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운드가 질적으로 수준 낮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연주는 흠잡을 데 없고 그 결과 사운드는 충분히 탄탄하고 영롱함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오랜만에 함춘호의 이름을 건 기타를 맛보는 즐거움에도 불구하고 장필순과 함춘호라는 두 거장의 만남을 통해 기대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는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음악활동을 계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2000년대에도 손꼽히는 명반을 내놓은 장필순과 명 세션 함춘호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사실 지난 5, 6집을 다시 뛰어넘는 그 무엇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앨범의 아쉬움이 단지 조동익과 윤영배가 쓴 곡의 부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좀 더 얘기하자면 메시지의 차원에서도 예를 들면 이청준이나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이 내놓았던 종교적, 철학적 인식을 기대해볼 수 있고 사운드의 차원에서도 과거 하나뮤직의 음악적 저력이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발휘되거나 장필순의 6집이 그러했듯 이전과는 다른 실험을 감행하는 작품을 기대해 볼 수 있었겠지만 이 앨범은 다소 소소하고 사적인 메시지와 기존의 음악적 흐름의 결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여러 가지 만남의 기록으로 되새겨볼 지점이 적지 않다. 일단 장필순과 함춘호가 만났고, 장필순과 함춘호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함께 하나님을 만났으며, 하나뮤직에 몸담았던 뮤지션들이 다시 만났고, 1980년대에 출발한 음악인들이 2000년대를 만나 내놓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각각의 만남들이 만들어 낸 파장의 취합으로서 이 앨범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인식될만하다. 비록 새로운 메시지, 새로운 사운드를 창출해내지는 못했지만 장필순과 하나뮤직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조금 알 것 같아요>나 <이곳엔 아무것도> 같은 곡은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다.
장필순의 번외편으로서, 함춘호와 함께 한 반가운 만남으로서 이 앨범을 즐기며 새 앨범을 기다려보는 우리는 장필순의 새 앨범이 에필로그 같은 이 앨범의 마지막 곡 <이곳엔 아무것도>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 공허에서 다시 출발하게 될 것임을 안다. 이 단명의 시대,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 그녀가 하나뮤직 식구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제주의 바람과 햇살이 담긴 앨범으로 돌아오는 순간 정점이며 현재 진행형인 1980년대산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이름이 다시 새로워지리라 믿는다. 많은 이들의 귀환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있는 오늘, 그녀의 이름은 여전히 가장 특별할 수밖에 없다. (서정민갑/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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