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벌 진트 - 존중받을 자격의 증명
- Posted at 2008/08/25 17:35
- Filed under interview/국내

버벌 진트(Verbal Jint)가 처음 한국 힙합 씬에 등장했을 때, 그는 요즘 김구라 식으로 말하자면 '건방짐의 아이콘'이었다. 싸가지의 아이콘이었고, 자신감(혹은 자만심)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그리고 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이런저런 수식어가 필요 없는 힙합 씬의 아이콘 그 자체가 되었다. 지금 한국 힙합을 얘기하면서 버벌 진트(VJ)라는 이름을 빼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는 어느새 한국 힙합을 대표하는 인물이 돼버렸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따라붙기 시작한 온갖 오해와 음해를 뒤로 하고 그는 실력 하나만으로 현재의 위치에 섰다. 그리고 2007년의 [무명]과 2008년의 [누명]을 통해 그는 자기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해보였다. 아래의 인터뷰는 버벌 진트 혹은 김진태라는 인물의 성장과 오해에 관한 두 시간동안의 기록이다.
일시: 2008년 8월 11일 15:30-17:30, 홍대 근처 카페
대담: 버벌 진트 vs 김학선
정리: 김학선
사진: 버벌 진트 제공
김학선: 처음 음악에 빠져들게 됐던 때를 기억하나?
VJ: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한국 FM 라디오는 물론이고 AFKN 라디오도 들었고, 좋아하는 노래들이 나오면 공테이프에 녹음하면서 내 나름대로의 믹스테이프를 만들기도 했다. 음악을 하나하나 꿴다는 생각으로 접근을 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흑인 음악뿐만 아니라 가요들도 좋아했고 밴드 음악도 다 좋아했다.
김학선: 당시에 친구들 사이에서 AFKN 듣는 게 흔한 경우는 아니었을 텐데.
VJ: 또래들 가운데선 아마 거의 없었을 거다. 어떻게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발견했던 거 같은데 그때 요일별로 밤 시간에 장르를 달리 해서 음악을 틀어줬었다. SWV, 엔 보그(En Vogue), 조데시(Jodeci) 같은 흑인 음악들을 틀어주는 타임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록 음악만 틀어주기고 하고, 그런 것에 흥미를 많이 느꼈다. 당시엔 인터넷이 없으니까 그 뮤지션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그냥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곤 했었다. 핫뮤직 같은 잡지도 많이 봤고, 또 강남역 타워레코드나 상아레코드에 들어와 있는 외국 잡지들을 보면서 거기서 정보를 많이 얻고 빠져들게 됐다.
김학선: 그럼 그때부터 흑인 음악 쪽도 많이 들었던 건가?
VJ: 그렇다. 그때 투팍(2pac)의 <I Get Around>라는 싱글이 차트에 올라갔단 소식을 듣고 찾아 들었던 기억이 나고, 스눕 독(Snoop Dogg)이나 노토리어스 B.I.G(Notorious B.I.G) 같은 추억의 힙합 음악들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힙합 음악뿐 아니라 펄 잼(Pearl Jam)이나 사운드가든(Soundgarden) 등의 테이프도 사서 듣고, 그냥 다 잡식으로 음악을 들을 때였다.
김학선: 당시에 록 음악과 힙합 음악을 동시에 듣는 건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VJ: 둘 사이에 취향이 갈라진 적은 없었다. 둘 다 흥미롭게 자극적으로 다가왔었다. 온갖 계기들을 통해서 그대로 완전 빨려들었던 것 같다. 특별히 기억나는 뮤지션으로 뷔욕(Bjork)이 있는데, 뷔욕 같은 경우는 부모님 따라서 해외여행 갔다가 유럽 어느 호텔에서 <Play Dead>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세상엔 저런 음악도 존재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름을 적어놓고 한국에 와서 찾아봤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국 나가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앨범을 구입하고 듣고 했던 기억이 있다. 또 사촌형들이 영국에 살고 있었는데 그 형들이 한국에 올 때 오아시스(Oasis)나 픽시스(Pixies), 큐어(Cure),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 쓰로잉 뮤지스(Throwing Muses) 등의 음악들을 테이프에 녹음해서 갖다 주곤 했었다. 남들보다는 좀 더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런 영향들이 뭐 하나가 딱히 죽지 않고 모두 다 나에게는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 주어지는 미끼들을 내가 잘 물었던 것 같다.
김학선: 그럼 음악을 직접 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건 언제부터였나?
VJ: 처음에는 장기자랑의 의미로서 생각을 하고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땐가 음악을 듣다 보면 따라 해보고 싶으니까 집에 있던 통기타를 가지고 연습을 했다. 학교 장기자랑에도 나가고 곡도 만들어보려고 하면서 주위 친구들을 끌어들였다. 갖고 있던 테이프 들려주고 CD 들려주고 하면서 취향이 같이 형성된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만들고자 했는데 뜻대로 잘 되진 않았고 혼자 방 안에서 곡을 쓰고 하면서 그렇게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썼던 가사들도 지금 형태완 많이 다르긴 하지만 발음에 있어서의 언어유희 같은 걸 많이 찾으려 했던 것 같다.
김학선: 그때 당시부터 라임이란 것을 생각했던 건가? 아니면 그냥 막연히 그렇게 만들고 싶었던 건가?
VJ: 그때는 그게 라임이란 건지도 잘 몰랐고, 그냥 미국·영국 음악들을 많이 듣다 보니 가사에서 뭔가 느껴지긴 했던 거 같다. 그런 걸 따라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김학선: 그런데 왜 하필 힙합이었나? 록 음악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VJ: 두 가지가 사실 되게 늦게까지 같이 갔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밴드 만들어서 카피 많이 했었고, 동시에 랩 음반들도 많이 사서 들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힙합 음악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했다. 밴드 음악과는 또 다른 사운드적 매력을 많이 느꼈다. 대학교 때도 밴드 활동을 했는데 밴드 활동이라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점점 더 느끼게 됐다. 멤버들과 취향을 맞추기도 힘들고, 밴드를 꾸려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면서 거기에 대한 약간의 반작용으로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음악을 원하게 됐다. 그리고 때마침 PC통신 흑인 음악 동호회들도 생기고 푸른굴양식장, 마스터플랜 등의 클럽도 생기고 하면서 그 분위기에도 상당히 많은 자극을 받았다. 결국 2000년에 밴드를 해체하고 그때부터 완전하게 힙합 쪽으로 기울어졌던 것 같다.
김학선: <1219 epiphany>란 노래 가사에도 잠시 나오지만, 힙합 클럽에 처음 갔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나?
VJ: 두 가지 자극이 있었다. '이곳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구나'라는 긍정적인 자극이 있었고, '근데 왜 이렇게 못해?'라는 부정적인 자극이 있었다. 허세만 가득한, 내용은 아무 것도 없이 겉멋만 든 사람들이 눈에 많이 보였다. 그런 두 가지가 같이 작용했다.
김학선: 그럼 그런 반작용으로 처음 힙합 음악을 할 때 이 씬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을 한 건가?
VJ: 그런 것보다는 그냥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놀리고 싶었다. 그리고 분명히 한국말로 된 랩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더 잘 만들어진 랩 음악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애호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씬의 변화 같은 거대한 것들은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난 너희들과 노선이 다르고 이렇게 똘똘하게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김학선: <노자>나 <To All The Hip-Hop Kids>를 만들 때 기존 힙합 씬의 반감이나 저항이 두렵거나 하는 생각은 안 했었나? 어떻게 보면 당시 그들이 힙합 씬의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들과 불화함으로써 그 안에 계속해서 들어가지 못할 거라는 우려 같은 것들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VJ: 대충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상은 다 하고 있었다. 오히려 예상보다는 덜한 반감이 있었던 것 같다. 신선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었고. 그리고 그때는 '거기에 못 끼면 어때? 우리가 새로 만들면 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저렇게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같이 하는 것 자체가 쪽팔린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김학선: 데프콘(Defconn)과 함께 EP 작업을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던 건가?
VJ: 처음에 다섯 명이 모였었다. 데프콘 형하고 나, 그리고 피-타입(P-Type) 형, 사륜구동 포워드(4WD) 형, (임)일수 형, 이렇게 하고, 원래는 절정신운한아 형도 함께 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어 빠지고 다섯이 함께 하게 됐다. 그때는 이제 '거대한 걸 한 번 해볼까?' 하는 분위기가 돼있었다. 내 개인적으로 하는 것과 다르게, '뭔가 뒤집자, 크게 보여주자.'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그때 다섯 명이 다 짧은 시간차를 두고 동시다발적으로 EP를 내기로 했었다. 거대해야 하니까 명분 같은 것들이 필요했고, 그런 명분에 맞춰 이런 주제의 노래 하나 있어야 하고, 또 다른 주제의 노래 하나 있어야 하고 하는 식의 치밀함을 서로에게 요구했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중압감 아래서 만들어진 측면은 분명 있는 것 같다. 진중하게 보여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약간은 한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김학선: 난 [Modern Rhymes] EP가 한국 힙합 역사에서 정말 기념비적이고 말 그대로 역사적인 음반이라고 생각을 한다. 만약 본인이 지금 시점에서 그 EP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VJ: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감사하다. 일단 내 개인적인 측면으로, 나에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음반이다. [Sex Drive] 싱글은 굉장히 헝클어져있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형질 같은 느낌이 있는데, [Modern Rhymes] EP는 앨범 처음부터 끝까지 정제된 느낌이 유지가 되는 음반이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소리의 질감 면에서 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비트 메이킹이라든지 가사의 전체적인 면에서 방향을 잘 잡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다른 방향으로 음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에게 스스로 참조가 되는 음반인 것 같다. 그리고 씬에서의 측면을 얘기하자면 그 이후로 EP가 되게 많이 나오기도 했었고, 이것도 이제 상투적인 표현이 돼버렸는데 소위 '감성 랩'이라고 하는 스타일이 처음 생겨났던 시작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라임과 문장이 다 말이 되는 완성된 한국말 랩 가사를 보여줬다는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은 갖고 있다.
김학선: [Modern Rhymes]를 만들면서 기존의 MC들이 앞으로 자신의 라임 방법론을 따를 거라는 확신이 있었나?
VJ: 그게 사실 나만의 방법론도 아니었고, 그때 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 방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방법론이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사실은 그 방법론이 일본 힙합에서도 하는 거고, 스페인어 쓰는 나라들에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쓰는 방식이다. 한국말로도 그렇게 해야 하는 거였기 때문에 당연히 모두 따라오리라 생각했다. 개인적으론 아직까지 그걸 안 따라오는 사람들이 정말 웃기다고 생각한다. 놀랍기도 하고. 그건 '랩이냐, 랩이 아니냐'의 문제이다. 그 방식은 내가 혼자서 창출해낸 것이 아니라 모국어 랩이 자리 잡힌 나라들에선 모두가 하는 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방향으로 모두가 다 따라오리라 생각했다.
김학선: 군 제대 후에 휘성이나 015B 등의 앨범에 참여를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메이저 시장으로 진출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면 그 생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VJ: 메이저 쪽에서도 제의는 있었다. 한창 제의가 많았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시기는 아니다. 015B랑 작업하면서 계약도 했었다. 장호일 형님이 계신 회사와 계약을 해서 [Favorite] EP도 만든 거였는데, 일단 내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걸 원하긴 하지만 그게 어떤 생활의 제약으로 다가오는 건 원치 않는다. 길에서 누가 날 알아보는 것도 되게 부담스러워하는 편인데 메이저와 계약을 하면 개인적인 나의 생활은 포기를 해야 한다. 난 그게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고 생각을 하고 회사와 계약을 했던 건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런 톱니바퀴에 끼워 맞춰 들어가면서 나의 자유로운 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지금은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현재 상태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다음 스텝이 어떻게 될지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그냥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만약 내가 큰 메이저 회사와 계약을 했다면 이렇게 다음 스텝이 뭐가 될지 편하게 생각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김학선: 현재 음악을 업(業)으로서 확실하게 결정을 한 상태인 건가?
VJ: 업이긴 한데, 학생 입장에서 보면 음악이 딴 짓이었던 거고, 음악 입장에서 보면 학업이 딴 짓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몇 다리를 거치면서 계속 음악을 해왔다. 물론 음악을 만드는 일이 제일 재미있고 제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걸 놓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것만 하고 딴 건 안 할 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학교를 졸업하는데 항상 학생의 자세로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서 공부를 계속 하고 싶기도 하고, 또 지금은 (티셔츠를 가리키며) 이렇게 티셔츠 만들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기도 하다. (웃음) 음악으로만 360도 둘러싸여진 생활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세상도 구축을 할 것 같다. 그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 버벌 진트는 자체 레이블 외에 'Overclass Central'이란 계열사(?)도 만들어서 ‘Yangnom'이란 캐릭터로 티셔츠를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날 인터뷰에선 그 티셔츠 가운데 하나를 입고 나왔다.)
김학선: [Favorite] EP는 [Modern Rhymes] 이후에 6년 만에 낸 작품이다. 그런데 이 음반 역시 EP였다. EP로 낸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VJ: 만약 EP가 아니고 정규 앨범을 낸다면 사람들이 다 소화를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열몇 곡 집어넣으면 사람들이 소화를 잘 못 한다. 그래서 완충의 형식으로 [Favorite]을 통해서 소품 같은 것들을 몇 개 던지고 내 스타일이 어떤 거라는 걸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게 과도기적인 앨범이라거나 쉬어가기 형식의 앨범이란 얘기는 절대 아니고, 듣는 사람들에게 보다 자연스럽게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순서를 그렇게 생각하고 만든 음반이었다.
김학선: 그리고 '오버클래스(Overclass)'라는 크루를 결성했다. 좀 독고다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크루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좀 의외였다.
VJ: 그렇게 독고다이는 아니다. (웃음) 성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되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여건도 잘 안 맞았고, 기존에 있던 크루들과는 내가 또 좀 안 맞는 부분들이 있어서 그게 여의치 않았었다. 그러다가 기존에 내가 했던 피쳐링 작업들을 통해서만 날 알고 있던 사람들이 [Favorite] EP를 통해서 나의 색깔을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됐고, 그걸 통해서 그 색깔과 통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모이게 됐다.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아까 말한 대로 오버클래스 하기 전에는 다들 독고다이란 소리를 들을 만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웃음) 음악뿐만 아니라 기질 같은 것에서도 맞는 부분이 많이 있었고, 그렇게 편하게 같이 음악도 하고 공연도 하고 놀러 다니자는 의미에서 결성을 하게 됐다. 그런데 크루의 성격상 기존의 크루들이 가지고 있는 가족애나 형제애 같은 부분들에서 많이 다르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되게 파편적이고 개인주의적이다. 형님, 동생으로 뼈대가 이루어진 것도 전혀 아니고 서로의 행동에 거의 관여를 하지 않는 편이다. 그동안 '버벌 진트가 크루를 만들었다더니 얘들도 하는 짓이 참 가관이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법한 사건들이 몇 개 있었다. (웃음) 오버클래스 만들고 이슈를 만들려고 노이즈마케팅을 한다는 얘기들도 많이 들었는데, 그걸 조직적으로 할 만한 성격의 크루도 아니고 그냥 우리 입장에선 '누명'을 쓴 거다.
김학선: 그런데 아무리 친목적인 성격이 강하더라도 음악적인 역량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다. 여러 흑인 음악 커뮤니티에서도 영국(Youngcook)이나 노도(Nodo) 같은 뮤지션들의 실력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했다.
VJ: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라 크루 하기 전부터 그 친구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함께 하기로 한 거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 사람들이 그 친구들에게 실력이 없다고 하고 의구심을 갖고 있는 건지 나도 대충은 알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봤을 때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사람들은 "퍼렐 윌리엄스(Parrell Williams)가 노래를 못 한다, 가창력이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퍼렐은 노래를 무지 잘 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가창력의 잣대가 힙합 음악에서도 그대로 드리워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퍼렐이 노래를 못하고 카니에(Kanye West)가 랩을 못 한다는 그런 어이없는 관점으로 노도와 영국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다. 단언하건데 카니에 웨스트는 랩 너무 잘 하고 퍼렐 윌리엄스는 노래 너무 잘 한다. 예를 들어서 "서태지보다 김경호가 가창력이 좋다"는 말에 난 절대 동의할 수 없다. 기량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되게 좁은 시야로 1등부터 죽 줄을 세워서 나누다보면 굉장히 구린 결과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가창력 좋다는 가수들의 음악을 난 되게 싫어하고 구리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가창력과 비슷한 관점으로 랩 음악을 바라보면 노도와 영국보다 잘 하는 사람이 무척 많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보는 관점이 달라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노도에게 기예를 부리는 듯한 랩을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면에서 노도는 자기완결성이 있는 아티스트라 생각하고 있다. 또 영국은 한국 힙합만 듣고 자란 리스너들이나 심지어 래퍼들까지도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가사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아무리 짖어봐야 우리는 타자들. 투수도 야수도 없는 타자들." 이런 가사를 난 촌철살인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을 굉장히 뛰어난 리리시스트라 생각하고 있는데, 영국이 빠른 랩이 없고 타이트한 스킬을 취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리시스트로서 갖고 있는 우월한 부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들이 아직 보여준 게 적어서 그런 인식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그들의 결과물들을 즐겁게 즐기고 있다.
김학선: 작년에 [무명] 앨범을 냈다. '빛이 없다'는 정도로 해석을 했는데, 이게 한국 힙합 씬을 가리키는 말인가?
VJ: 1차적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당시 개인적인 상황에서도 그런 느낌이 있었다. 주변에 있는 것들 가운데 뭐가 좋고 나쁜지도 잘 가늠하기 힘들었던 상태였는데 그런 두 가지가 다 복합적으로 들어가 만들어진 이름이다.
김학선: '빛이 없다'는 의미로 보자면 [Modern Rhymes]를 냈던 2001년과 비교해서 조금도 나아진 게 없다고 생각을 한 건가?
VJ: 내가 볼 수 있는 범위로 한정을 해서 내가 느낀 것만 얘기를 한다면, 일단 창작자들의 수준은 전반적으로 나아진 것 같다. 음악엔 스타일이 있고 서브스탠스가 있는데 힙합 음악에선 그 두 가지를 서로 잘 구분해서 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에서 랩 음악을 만드는 창작자들은 스타일 면에서 전반적으로 기량이 향상된 것 같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2001년에 난 한국말로 된 랩 음악을 거의 '못' 들었다. 계속 삑사리로만 이루어진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시에 한국 랩 음악을 듣지 못했는데, 그땐 100명 가운데 90명이 그런 식으로 랩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소리를 낼 줄 알고 연주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내가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이들의 결과물을 들으면서 즐거워하는 일은 2001년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런 면에선 발전을 한 것 같은데, 그 음악을 수용하는 층이 많이 빠져나가고 또 다른 새로운 층이 그 자리로 대신 들어온 것 같다. 그걸 3-4년 전부터 슬슬 몸으로 직접 느끼기 시작했는데 한국 힙합으로만 리스닝 경험이 한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제 음반을 사는 주류가 되어버렸다.
김학선: 그럼 그 '무명'이란 말이 이제 창작자보다는 한국 힙합의 수용자나 그 저변을 겨냥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한 것인가?
VJ: 역시 1차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그런 걸 알고서 거기에 기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타일 상으로도 아니고, 내용물 상으로도 전혀 진정성이 있는 게 아닌데 껍데기만 어떻게 잘 칠해서 새로 들어온 순진한 어린 팬들의 물을 빼먹는 그런 사람들도 함께 공존을 한다. 그런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 [무명]이란 이름을 짓게 됐다.
김학선: 힙합 씬을 보면서 가장 많은 답답함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VJ: 어린 팬들이건 이쪽 음악을 오래 향유해온 팬들이건 계속 이렇게 어린 모습으로 있는 힙합을 인정해줄 때다. 얼마 전에 모 웹진과 잡지에서 [누명]에 대한 리뷰를 쓴 걸 봤는데, 그 두 사람 모두 힙합 음악을 중딩 음악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런 식의 리뷰가 나온 거라고 생각을 한다. 중딩 음악에 맞춰서 나온 힙합 음반들은 평할 게 많다는 식으로 호평을 해주고, 조금 더 어른스런 힙합을 보여주면 인정을 해주지 않고, 음반을 소비하는 층이건 매체건 아직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힙합을 어린애로 보고서 리뷰를 쓰니까 그런 웃기는 일들이 벌어지는 건데, 힙합을 그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게 무척 아쉽다. 그런 인식들 때문에 조금 더 눈높이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의욕을 잃게 된다.
김학선: 그럼에도 지금 버벌 진트의 앨범을 구매하는 주소비층은 방금 전까지 계속 얘기해온 중딩 팬들이고 소위 말하는 '힙합 지진아'들이다.
VJ: 되게 재밌다고 생각을 한다. (웃음) 일단 누가 됐든 음반을 사주는 건 나에게 좋은 일이다. 그리고 어떤 식의 반응이 됐든 간에 내가 내놓은 결과물을 듣고 반응을 보인다는 자체가 좋다. 나의 음악을 안 좋게 들었다고 해도 그게 어떤 식으로든 가닿아서 작용을 한 거니까. 어떤 식의 반응이건 일단 음반을 사서 들었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의 성과라고 생각을 한다.
김학선: '왜 힙합은 이렇게 십대 청소년들만 듣는 걸까?'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VJ: 동시에 되게 여러 가지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일단 90년대에 힙합이란 단어가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십대들을 대상으로 했고, 힙합이란 이름을 붙여서 나왔던 가요들 역시도 그저 십대들만을 위한 가요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때 십대를 보내고 지금 이십대가 된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의 힙합 음악을 들려줘도 그냥 십대의 음악이라고 생각을 하고 듣는 것 같다. 그게 외국의 힙합이건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힙합이건 간에. 이 음악에서 뭔가 더 끄집어낼 수 있다는 기대 자체를 사람들이 안 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정도의 완성도만 있으면 나머지는 다 젊음의 패기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그 정도 음악이라는 시각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강하게 자리잡혀있는 것 같다.
김학선: 그런 인식들이 바뀔 가능성은 좀 있다고 보나?
VJ: 내가 큰 얘기, 거시적인 얘기를 잘 못하는 편이라 대답하기가 좀 어렵다. 특히나 미래에 관련된 얘기는 더욱. (웃음) 힙합을 어린애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고, 힙합이란 음악을 갖고 이 방향, 저 방향으로 경계를 뚫고 나가려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면 당연히 그 나름의 씬이 생길 것이다. 이 정도밖에는 얘기를 못 하겠다. (웃음)

김학선: 이제 [누명] 앨범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이 앨범을 내면서 마지막 정규 앨범이란 얘기를 했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VJ: 2007년에 [Favorite]부터 해서 지금까지 계속 미친 듯이 곡들을 만들고 작업을 해왔다. 억지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속에서부터 뭔가가 계속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렇게 결과물들이 계속해서 나왔는데 이 [누명] 앨범이 그 달리기의 마지막 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정규 앨범이라는 뜨거운 방식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건 그만 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제 정규 앨범이란 걸 내지 않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질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그 말이 무슨 '충격발언'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일도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좀 식은 머리로 음악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사수자리] 믹스테이프를 지금 완성해놨는데 이거 발표하고서는 몇 달 정도 그냥 놀 생각이다. 음악 작업은 계속 하겠지만 [무명]이나 [누명] 같은 형식의 앨범은 안 낼 것 같다.
김학선: 그럼 앞으로의 작업 형태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봤나?
VJ: 버벌 진트의 정규 앨범이란 형식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누구랑 무슨 프로젝트를 할지는 나도 알 수 없는 거고, 내가 다른 이들에게 곡들을 주면서 계속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 아니면 치사하게 이름을 바꿔서 앨범을 낼지 (웃음),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지만 방식은 너무나 많다. [무명]을 낼 때도 그랬는데 일부러 안 넣고 남겨둔 곡들도 만만찮게 많이 남아있다. 그게 [무명]이나 [누명] 색깔과 너무 달라서 그랬던 건데, 그 색깔이 기존에 정규 앨범 내던 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그 모습을 어떻게든 드러낼 생각인데 그 방식이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방향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김학선: 앨범 제목이 [무명]에 이어서 [누명]이다.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VJ: 내가 생각하고 집어넣은 의미가 있고,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가 있다. 두 가지 다 유효하다. 내가 생각했던 '누명'은 아까 크루 얘기할 때도 나왔지만 노이즈마케팅이나 내용은 없는 것들이 설레발치려고 모인 애들이라는 누명, 아니면 몇 가지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얽혀 씌워진 내 개인적인 의미에서의 누명, 이런 것들에서 처음 영감을 얻어 시작하게 됐다. 그런 것들에서 '누명'이란 키워드가 딱 떠올랐고, 그 다음에 차분하게 생각해보니까 방금 얘기한 그런 사건들은 되게 사소한 누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명 씌우기'라는 게 사방에 널려있었던 것 같다. 나에 대해서, 아니면 좀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좀 더 넓게 보면 한국의 힙합 음악 자체에 대해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다. 마땅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편견으로 인해서 잘못 받아들여지고 오해되고 하는 그런 것들. 그런 의미에서 [누명]이란 제목을 지었다.
김학선: 이 [누명] 앨범이 원래는 정규 앨범이 아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VJ: 그렇다. 원래는 [무명]에 대한 재해석 성격의 리믹스 앨범으로 [누명]을 내려고 했었다. 올해 초까지는 그런 생각이었는데 이후에 아까 말한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웃음) 그 사건들을 접하면서 거의 동시에 '누명'이란 키워드를 생각했고, 또 올해 초에 부정적 영감과 긍정적 영감이 섞이면서 창작열이 막 불타올랐다. 그런 일들이 겹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해야만 하는 말이 너무 많이 생겨나버렸다. 애초에 계획했던 [누명] 리믹스 앨범에 끼워넣기엔 너무 많은 얘기들이 생겨나서 아예 정규 앨범으로 방향을 바꾸게 됐고, 리믹스 앨범은 보너스 음반으로 수록을 했다. 애초에는 [무명]의 뒤를 잇는다는 언어유희적인 의미로 [누명]이란 이름을 생각했던 건데, 앨범의 성격과 방향이 바뀌면서 콘셉트와 딱 맞는 제목이 돼버렸다.
김학선: 지금도 얘기가 나왔지만 [누명] 앨범 발매 전에 이런저런 사건들이 계속 있었다. 그런 사건들에 상처를 많이 받는 편인가?
VJ: 나와 같은 경우를 당해온 사람들과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상처를 많이 받는 편인지는 모르겠는데, 크든 적든 간에 데미지는 당연히 있다. 그 데미지들이 내가 만드는 것들에도 작용을 한다. 영향이 녹아들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런데 데미지가 됨과 동시에 내가 정말로 힙합적인 가사를 진실하게 쓸 수 있는 재료가 되어주었다. 나에게 "진짜 헤이터(Hater)가 어디 있다고 그러냐?"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일련의 사건들은 날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이 늑대의 무리들처럼 존재한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헤이터들에게 난 그야말로 힙합적인 가사를 쓸 수가 있게 된 거다. 여기서 말하는 힙합적인 가사는 "헤이터들아, 내 뭐시기나 먹어라"라고 조롱하고 "나는 리스펙 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끊임없이 증명하는 거다. [Modern Rhymes] EP에는 그런 가사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헤이터들 때문에 역설적으로 정말 힙합적인 가사를 쓸 수 있는 축복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됐다. 만약 안 그랬다면 <투올더힙합키즈 투> 같은 가사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
김학선: 버벌 진트라는 뮤지션이 받고 있는 오해 가운데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오해가 있다면?
VJ: 가장 최근에 있던 오해가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데, 아까 말한 몇 개의 리뷰나 일부 리스너들의 같은 선상에 있는 반응들을 볼 때 그렇다. '결국엔 잘난 체에 기반한 이야기밖에 없는 것 아니냐', '잘난 체가 영감의 유일한 원천 아니냐'는 식의 오해들이 가장 짜증도 나고 가장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은 오해다. [누명] 앨범에 대한 리뷰들을 보고 되게 어이가 없었는데, 이를 테면 앨범의 수록곡들 가운데 처음 시작하는 다섯 곡엔 잘난 체가 하나도 없다. 그런 내용이 전혀 아니다. 넓게 봐서 <2008 대한민국>이나 <역사의 간지>, <Tight이란 낱말의 존재이유>, <1219 epiphany> 정도를 빼면 나머지는 완전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이다. 힙합엔 한 번 듣고 말 가사밖에 없다는 그런 마인드로 힙합을 듣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인 것 같다. 힙합을 중딩 음악이라고 생각을 하고 들으면 <배후>가 잘난 체 가사로 들릴 것이다.
김학선: 앨범이 하나의 콘셉트를 갖고 순서대로 쫙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VJ: 빵빵하게 모든 곡에 랩 있고 훅 있는, 잘 뽑혀진 싱글들의 모음집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명]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것보다는 앨범 첫 트랙부터 끝 트랙까지 그냥 흘러가는 그 흐름에 더 신경을 썼다. 1, 2, 3번이 다 연주곡인데 거기서부터 확실하게 말해두고 시작한다는 느낌으로 그렇게 배치를 했다. '누명'을 키워드로 해서 내 개인적인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힙합 음악 전체를 나름대로 의인화해서 스토리라인을 만들었다. 그걸 영화로 찍는다면 이런 식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곡들의 배치를 했다. 그냥 곡 제목만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다.
김학선: 전작들, 특히 [무명] 같은 경우는 유기적인 흐름에서 벗어나있다는 평가가 많았다. 심한 표현으로 '그냥 랜덤으로 돌린 것 같다'라는 얘기까지 있었다.
VJ: 경험의 양과 질이 너무 달라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랜덤으로 돌린 것 같은 한국 힙합 앨범이 작년에 아마 30장은 넘게 나왔을 거다. 나에게 [무명]은 머리가 깨지게 구성을 한 앨범이다. 그 구성이 맘에 안 들면 맘에 안 든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거지만, 구성이 없다고 얘기하는 건 역시 '누명'인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럼 한국 힙합 앨범들 가운데 구성이 잘 된 앨범이 뭐가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그 사람들 입에선 십중팔구 분명 우스꽝스러운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대답을 들으면 비웃음밖에는 안 나올 것 같다.
김학선: 곡 작업을 할 때 샘플링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VJ: 이번 앨범에서도 내가 만든 트랙들은 샘플링이 없다. 2001년에 [Modern Rhymes] 만들 때 소위 모자이크 샘플링이란 작법을 사용한 이후로는 샘플링으로 곡을 만든 적이 없다. 미디와 실제 악기를 사용해서 곡을 만든다. 그 방식이 나에게 편하고 딱 맞는 것 같다. 물론 카니에 웨스트도 좋아하고 넵튠스(The Neptunes)도 엄청 좋아하고 팀발랜드(Timbaland)도 좋아하지만, 스타일 상으로 뭐가 더 뛰어나고 바람직하고 그런 것들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있다. 다 좋아하지만 그냥 난 이런 쪽인 것 같다. 난 내 맘대로 코드와 멜로디를 쓰는 걸 좋아하고, 키보드 연주를 내가 직접 해서 집어넣는 걸 좋아한다. 한 마디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작곡을 즐기는 편이다.
김학선: 앞으로도 그 방식을 고수할 생각인가?
VJ: 크게 바뀌진 않을 것 같다. 이쪽으로만 워낙 파오다 보니까 이제 샘플링 작법이 좀 어색하다. 유재하의 <텅 빈 오늘밤>이란 노래를 가지고 혼자서 드럼 붙여서 만든 곡이 있는데 내가 듣기에도 어색하다. 나 혼자서 재미를 느낄 순 있지만 사람들 앞에 내놓기엔 이미 어색할 정도로 샘플링 쪽과는 멀어져버렸다.
김학선: 비트와 랩 작업을 할 때 보다 즐거움을 느끼는 쪽이 있나?
VJ: 일단 비트가 더 고단하다. (웃음) 더 피곤하다. 두 가지 다 즐겁고 희열이 있고 재미있는데 비트는 금방금방 만들지를 못한다. 마치 기말고사 앞둔 학생처럼 밤새 신경 곤두서있는 상황을 거치면서 비트는 탄생하는데, 이제 랩 가사는 생활처럼 써진다. 옛날엔 그렇지 않았다. 2001년쯤엔 랩 쓰는 것도 똑같이 고단했다. 시간으로나 에너지로나 똑같이 많이 들었는데, 언젠가부터 랩 쓰는 거는 체화가 된 것 같다. 랩 생활이 된 것 같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는데 요새는 그런 친구들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스윙스(Swings)나 이-센스(E-Sens), 도끼 같은 친구들 보면 일단 쏟아내는 가사의 양이 미국에서 흑인들이 하는 것처럼 엄청나다. 그렇게 쏟아내는 게 보통 정력으로 되는 게 아닌데. 예를 들어 옛날에는 한국 농구에서 덩크가 안 나왔지만 90년대 프로농구가 생기면서 하나둘 덩크를 하기 시작한 것처럼 지금 랩 하는 친구들의 스펙도 옛날보다는 많이 좋아진 것 같다.
김학선: MC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비트 메이커로서의 재능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다는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VJ: 좀 아쉽긴 하다. 시간이나 정성도 더 많이 들고, 버벌 진트라는 이름을 지탱해주는 큰 부분인데 랩에 가려지는 측면이 있어 아쉬운 마음은 있다. 그래도 점점 더 많은 분들이 알아봐주고 있는 것 같다. 옛날에 데프콘 형이랑 <동창회>, <두근두근 레이싱> 같은 곡들을 쓸 때는 곡을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해서 주목해주는 사람들이 손에 꼽을 정도여서 솔직히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꾸준히 쓰다 보니까 나의 스타일이나 다른 비트 메이커들과의 차별성 같은 것들이 점점 인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김학선: 힙합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들도 다양하게 듣는 걸로 알고 있다. 그 점이 힙합 음악을 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나?
VJ: 물론이다. 나에겐 너무나 소중한 자양분이다. 과거에 들었던 것들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가사를 쓰고 그 정서를 표현하고 랩의 리듬을 만들고 하는 것들뿐만 아니라 비트를 만들고 멜로디를 만들고 앨범의 구성을 짜는 그 모든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의 기억들과 내가 즐겨왔던 그 모든 음악들이.
김학선: [무명] 앨범에서 토마토(Tomato)의 <무비스타>를 커버하기도 했다. 힙합 말고 아예 모던 록이나 이런 음악을 해 볼 생각은 안 해봤나? 예전부터 모던 록을 해도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VJ: 분명히 힙합의 틀이 아닌 다른 음악을 하고 싶은 생각은 갖고 있다. 그동안 끄적거려놓은 곡들 가운데 그런 식의 곡들도 꽤 있는 편이다. 그걸 어떤 식으로 포장을 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자기한테 다른 사이드가 있다면 그걸 내버려두기보단 세상에 보여주는 게 더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뭔가를 할 것 같다. (웃음) 지금으로선 약간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긴 한데, 구리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어떤 포지션을 찾을지 고민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김학선: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즘 가장 즐겨듣고 있는 록 음악은 뭐가 있나?
VJ: 최근에 옛날 라이드(Ride) 음반들을 한 번씩 쭉 들었다. 특히 단물 다 빠졌을 때 제일 우울하게 나왔던 [Tarantula] 앨범을 아주 좋게 들었다. 당시에 상아레코드에서 시디로 샀었는데 오랜만에 들으니 무척 좋았다. 그걸 꺼내들으면서 호기심이 생겨서 AMG에 가서 리뷰도 보고 했는데 [Tarantula] 앨범은 별이 한 개 반인가 그랬다. (웃음) 이미 시들어버린 꽃 같다는 뉘앙스로 글을 써놨던데 난 거기서도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김학선: 요즘 데프콘과의 작업이 뜸하다.
VJ: 특별한 이유나 계기나 불화 같은 건 없다. 내가 너무 언더그라운드 영역을 파고들다보니까 현재로선 교집합이라 할 만한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니까 방향이 좀 달라진 것 같다.
김학선: 이건 개인적으로 기대가 많아서 물어보는 건데, 디엔 미셸(Dien Michel)의 앨범 계획은 없는 건가?
VJ: 나도 잘 모르겠다. 현재로선 알 수가 없다. 원래는 한 번 준비를 한 적이 있었는데 중간에 좀 틀어졌고, 일단 크릭이 미국에 있다 보니 소통을 자주 못하는 이유도 있다. 디엔 미셸 대신 비-솝(B-Soap) 형의 솔로 앨범이 곧 나오는데 그게 나와서 분위기가 좋아지면 그 여세를 몰아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디엔 미셸은 비-솝, 버벌 진트, 크루시픽스 크릭(Krucifix Kricc)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이다.)
김학선: 현재 한국 힙합 씬에 드리워져 있는 어둠이 걷힐 거라고 생각하나?
VJ: 일단 양적으로는 올해 장난이 아니다. 특히 2008년 여름, 최근에 나오는 앨범 수도 그렇고 언더그라운드에서 판매되는 판매량도 그렇고 거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난 이 정도까진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그렇게 돼버렸다. 이렇게 양적인 폭발이 질적인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긴 하다. 그리고 내가 뮤지션이 아닌 한 명의 팬으로서 얘기를 하자면 더 많은 뮤지션들이 몸 사리지 말고 더 창의적으로 확확 나가줬으면 좋겠다. 앨범의 판매량을 고려하면서도 자신들의 창의성을 드러내는 그런 줄타기를 잘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씬이 오래 갈 수 있는 힘이 더 생길 거라고 본다. 이미 있는 걸 긁어먹는 게 아니라 있는 거에 뭔가를 더하는 그런 창작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학선: 앞으로도 계속 힙합 씬에 남아있을 건가?
VJ: 정규 앨범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뜨거운 시기와 그 다음 시기를 구분 짓는 제스처로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던 것, 내가 만들던 것이 어디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곳과 결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리를 조금 약간 다르게 두고서 활동을 할 것 같긴 하지만,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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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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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세탁기 2008/12/29 01:43 | M/D | Reply
잘 봤습니다.... 리드머나 힙합플레이야같은 힙합 사이트에서와는 달리(여기는 사실 알려질 만큼 알려진 곳인지라) 힙합뮤지션으로써의 전반적인 이야기가 중심이네요. 그래서 어쩜 더 괜찮은듯...
다 재미있게 들었는데 아무래도 딱 하나 노도나 영국에 대한 평가는 동의하기 힘드네요... 노도의 경우는 보컬로 비교하자면 김장훈 정도인듯한데... 개성이라는 것도 정도가 있고 기본은 있다고 보거든요. 영국 가사의 다양성을 말했지만 그것도 다양성인지 아니면 편협성인지.. -
ㅎㅎ; 2009/01/01 22:29 | M/D | Reply
저도 개인적으로 열번 양보해 영쿡의 Ad Hoc에서의 가사까지는 꽤 멋지다고 느꼈지만 다른 곡에서의 영쿡이나 노도의 결과물들은 굳이 획일적인 기준으로 줄 세우지 않아도 구리게 느껴지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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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기 2009/01/23 07:04 | M/D | Reply
저도 뭐 영국이나 노도는 일단 비유 자체가 아주 저열해요. 위에서 진트씨가 언급한 타자에 관한 가사는 아주 멋졌지만, 그러한 결과물이 꽤 많았으면 모를까...나머지는 별로 좋게 들리지는 않더라구요. 지적이고 세련된걸 원하는게아니라, 저열한 것이 싫은거죠.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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킼키 2009/07/23 23:53 | M/D | Reply
카니예웨스트랑 패럴의 예를 들은 것은 가창력과 랩스킬로 무장한 '실력' 이라는 것이 아닌 그냥 자신의 스타일을 충분히 표현 해내는 개성이랄까? 그런것을 말한것 같네요.
솔직히 언더에도 개코처럼 귀에 쏙쏙박히는 한글랩 이나 VJ처럼 화려하면서도 부드러운 랩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을진 몰라도 자신의 스타일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목소리와 어울리는지 등등을 몰라서 없어보이기도 하죠. -
J나킴 2010/05/12 04:54 | M/D | Reply
잘봤어요 ^^
퍼갈게요 (출처 꼭 남길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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