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 (2007/시와)
7.5
01. 길상사에서
02. 기차를 타고
03. 사실, 난 아직
04. 랄랄라
1.
화양연화를 기억하시나요?
시와와 처음 마주한 것은 홍대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작은 언덕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는 역시나 작은 클럽, 빵에서 연주하던 뮤지션들이 한 곡씩을 덧대어 만든 빵의 세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에서였습니다. 크지 않은 서울, 그 중에서도 무척이나- 좁은 동네인 홍대 앞 신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다양하며 진취적인 시도들이 담겼던 그 2장짜리 컴필레이션에 시와는 <화양연화>라는 곡을 보탰지요. 확고하게 스타일리쉬했던 몇몇 밴드들의 인상적인 싱글들에 비하자면, 시와의 노래는 유행을 선도하거나, 아주 독창적인 부류는 아닌 것처럼 들렸습니다. 비약하자면, 클리셰 같았달까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스타일'상 그렇다- 는 얘기일 뿐, 사실 <화양연화>가 흘러나오는 동안 저는 내내 멍- 했습니다. 가끔씩 시간이나, 공간의 흐름이 정박된 것 같은 순간들 있지요. <화양연화>가 흐르던 그 순간이, 제겐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화양연화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 라는 뜻의 중국어라 하더군요.(아시다시피, 왕가위 감독의 영화제목이기도.) 우리말로는 적당히 '봄날'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을라나요. 흔히 좋았던 시절의 은유로 '봄'을 많이 쓰니까.(서울의 봄!) 봄, 좋지요. 따스한 햇빛, 나른한 날씨, 겨우내 얼어붙었던 모든 것이 다시 한 사이클을 시작하는 때, 그런 봄. 한데, 시와는 <화양연화>에서 그런 따스한 풍경을 성기게 스케치하다 결국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 한 때"가 "사라집니다"라며 끝맺음 합니다. 어쩐지, 처음부터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는데. 그녀가 그려낸 것은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가 아닌, 그것의 '사라짐'으로 들립니다. 그것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음'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없음, 그것은 '자리 없음'이 아닌 '없는 자리'입니다. 자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텅 빈 자리.
2.
다 쓴 충전식 건전지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고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누릅니다. 작게 웅- 소리를 내며 CD가 돌아갑니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머리맡 전등의 엷게 전기 돌아가는 소음과 함께 잠시 모두들 적막해지는 시간. 이윽고 기타의 선율이 잔잔히 퍼져나갑니다. 기타는 조심조심, 한음 한음을 신중하게 퉁겨 나갑니다.
지난 레코딩은 잠시 넣어두고, 시와의 공식적인 첫 번째 싱글- [시와]를 재생시킵니다. <길상사에서>부터 <랄랄라>까지. 채 20분이 되지 않는 동안. 크지 않게 녹음된 기타와, 꼭 그만큼 작은 시와의 목소리. 시와는 줄곧 조용하게 노래합니다. 시와의 노래들을 규정짓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우리는 시와의 음색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한 글자 예사로 넘어가는 법 없이, 노래(선율)를 연주한다기보다는 차라리 힘겹게 한 음, 한 음을 뱉어낸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은 시와의 목소리. 레가토와는 거리가 먼 시와의 노래에서는 종종 목소리의 사이사이, 특유의 여백이 발견됩니다. 여백, 악기들의 편성도 그와 닮았습니다. 유일하게 전자 기타 연주가 포함된 <사실, 난 아직> 정도야 다소 예외적이겠지만, [시와]에서의 대부분의 순간들은 '최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사실, 난 아직>도 풍성한 사운드와는 거리가 먼, 말 그대로 '비교적' 들어찬 정도입니다.) 요컨대, 시와의 음악은 감산(減算)의 음악입니다.
그런 고로, 실상 시와의 짧은 음반에 가장 많이 녹음되어 있는 것은 목소리나, 악기소리 같은 것이 아닌, 그것들의 사라짐- 텅 빈 자리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텅 빈 무대에서, 조그맣게 기타나 키보드 같은 것을 연주하는 것. 그렇지만 그 공간은, 기타 소리나 목소리로 충만해질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음을 새기면 새길수록 더욱 부각되는 것은 그 가벼운 음의 진동들로는 도무지 채우지 못할 여백, 그 작고 무한하게 비어있는 공간들입니다.
감산, 그리고 텅 빈 자리의 틈입(闖入)은 [시와]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모티브인 (자연을 비롯한) '풍경'을 감각하는 방식과 직결됩니다. 청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다른 시간/장소의 공기를 충실하게 재현해내는 것이 대개의 전통적인 미적 표현의 주요한 과업 중 하나라면, 시와의 것은 사실 그것의 재현이 불가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거든요. <길상사에서>는 '길상사'라는 공간적 속성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길상사 그 '자체'에 대한 소묘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길상사는 매개이며, 실질적인 묘사대상은 길상사를 매개로 한 풍경들과의 '소통'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소통은 불가능하지요. 시와는 "아름다운 것들"을 예찬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한 걸음 / 입 맞추고" 돌아섭니다. 그것과 맞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인정하듯, 아름다운 것들과 나/시와는 분리되어있습니다. 나/시와가 그 아름다운 것들에 속하지 않기(혹은 속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시와]에서 종종 감지되는 (목소리/악기들의) 여백은 충만하지 못한 나, 결여된 나에 대한 은유입니다. <화양연화>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의 사라짐에 대한 노래이듯이, <길상사에서>도 길상사에 대한 노래가 아닌, 그것과의 이별- 혹은 그것으로부터의 소외에 대한 노래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듯, 뮤지션 시와에게 풍경이란 나/시와와 한 없이 유리된 풍경입니다.
결여를 적극적으로 표면화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시와의 노래들과 닮은 포크 음반 몇몇을 기억해낼 수 있습니다. 오소영의 [기억상실]은 그와 가까운 하나지요. 시와의 것보다 더욱 록-적이며 건조한 톤으로 조율되어 있는 오소영의 음악은 그만큼, 직접적으로 건조한 삶을 그려나갑니다. 시와의 대상이 풍경이라면, 오소영의 대상은 사회입니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대상으로부터 유리되지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정체성에 현기증을" 겪은 오소영은 자신을 덜 박힌 못이라 이름 짓습니다.(<덜 박힌 못>) 음반의 표제곡이기도 한 <기억상실>에서 오소영은 좀 더 직설적으로, "왜 굶고 있냐고? 돈이 없으니까" "잘 곳은 있냐고? 물론 없지"라며 사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화폐로 일원화 되어있는 사회에서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한 주변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느 민중가요들처럼 그녀가 꿋꿋하게 저항을 노래하는 것은 아닌데,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부질없다"라 말하기 때문입니다.(<부질없어>) 그래서 그녀에게 모든 정치란 무의미해 지지요. 메마른 그녀의 목소리가 지배적인 심상을 구축하는 [기억상실] 중 가끔 생기를 띠는 몇몇 곡에서 오소영은 가파른 사회와 조금 멀찍이서, 일상을 살면서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소소한 다짐들을 들려주곤 합니다. 단편들. 그녀의 노래는 대부분 짧고 간결합니다. 이- 두꺼운 삶의 무게를 감당할 '개인'으로서의 조그마한 제스처들. 그러나 그 무게가 쉽게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기에, 조금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안쓰러움의 대상은 그녀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결국 오소영은 미래에 대해 기대하지 않을 것을 택하지만, 시와의 선택은 조금 다릅니다. 시와 역시 결여된 자신을 내보이고 있지만, 도래할 미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시와의 긍정적인 전망들을 역시 그녀의 노래들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다시 [시와]를 재생시키기 전, 우리는 잠시 경유해야 될 정류장이 있습니다. 팝이라는 정류장, 우리는 웰-메이드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문을 천천히 두드립니다. 웰-메이드, 직역하자면 잘-만들어진. 하지만 그것보다는 '갖출 것 다 갖춘'이라는 표현이 더 쉽게 다가오지요? 사지 멀쩡, 적당한 키, 호감 가는 인상, 그렇게 갖출 것 다 갖춘 것이 바야흐로 웰-메이드한 생김새지요. 이곳저곳 산재한 몇 가지 기준들. 외모라면 팔 다리, 키 등이 기준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팝에서의 웰-메이드라면?
아, 물론 모던 록에 반반한 여성 보컬 같이 제반적인 요소들도 있겠지만 일단 음악에만 집중하지요. 우리는 음악의 여러 요소들 중에서도, 밑그림. 기초적인 구조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설이 갖출 것 다 갖추었다는 평을 들으려면 기-승-전-결이 명확해야 된다고 공교육 시절 언뜻, 배웠던 것 같은데- 음악도 일종의 텍스트라는 측면에서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좌우지간 적당한 전주에서 적당한 첫 번째 버스(verse)로, 적당한 긴장감을 주다 이내 후렴에서 확실하게 어필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웰-메이드 팝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기술'입니다.(여기에 또한 적당한 종지period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이 중 후렴은 그중에서도 중요한데, 각각의 부분을 '하나'로 엮는 중심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팝에서의 개별 부분은 후렴이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매끈하게 통합되기 위해 존재한다 할 수도 있습니다. 목적론적이지요. 후렴이 종종 반복성을 띄는 것은 개별 곡으로서의 (하나로 통일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지의 적극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에는 상대적으로 주관의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많지만, 이러한 기술적인 과정이 웰-메이드를 직조해내는 핵심적인 기술이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멜로디와 팝의 중심에 대하여 조금 더 검토해보도록 하지요. 멜로디는 종종 팝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는 합니다. 가장 팝-적인 것은 가장 캐치한 것, 이라는 가정에서 우리는 캐치한 멜로디의 전제군주化를 엿볼 수 있지요. 캐치한 멜로디는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나머지 모든 음악적 요소의 봉사를 필요로 합니다. 또한 그와 상관없는 외부의 것들을 효과적으로 차단시켜야 합니다. 멜로디의 마술에 효과적으로 걸려들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생각할 시간 따위 줄 수 없지요. 나만을 봐주세요, 나만을 들어주세요, 나만을 느껴주세요. 그것은 캐치한 멜로디의 소망입니다. 당신이 날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난 당신을 지배할 것. 다만, 그 순간 멜로디는 모종의 약속을 해야 합니다. 당신이 날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난 당신에게 완전한 충만함을 주겠어. 완전한 쾌감을 선사하겠어.
멜로디는 완전히 이데아적인 형상을 보여주어야 합니다.(그것이 설령 가면이라 한들!) 그것은 외부의 요인을 참조할 필요 없이, 언제나 참이 되어야지요. 내부의 모순은 적거나,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내적으로 순환되어야 합니다. 시작은 중심을 향해 말려있고, 끝도 역시 중심을 향해 말려있지요. 나/너를 가르는 경계는 뚜렷합니다. 하나의 중심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통합하려는 팝의 의지, 저는 이것을 팝의 자기-완결적 의지라 부르겠습니다. 대중음악 중 대다수는 이러한 팝의 자기-완결적인 의지가 작용하는 범주에 속해 있습니다.(저마다 간단한 예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이런 의지의 작용과 관련된 문제는 엄밀히 말해 개별 곡의 멜로디가 뛰어난가, 그렇지 아니한가의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음악의) 개별적인 요소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로서, 중심을 기점으로 통합이 되고 있는가?(모든 요소가 하나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가?). 혹은 그렇지 아니한가? 로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시와]의 경우는 어떤가요?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사실 대부분 눈치 채셨겠지만, 시와의 멜로디는 분명 유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팝-적으로 엮여있는 것은 아닙니다. 팝-적으로 엮여있지 않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하나의 중심을 향해 수렴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길상사에서>부터 살펴보지요. 4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목소리와 나일론 기타로 연주되는 선율은 다소간의 변주가 첨가되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의 동기가 반복되는 양상입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이 반복되면서 그것은 충분히 인상적으로 들려오지만 정작 중심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종 비슷한 강도의 연주가 흐르는 와중, 중심과 주변의 경계는 모호해집니다. 모호한 경계만큼이나, 중심과 주변간의 위계도 모호해지지요.(위계는 경향적으로 제거되려 합니다.) 그리고 한 번의 조바꿈 뒤 다소 고조되는 공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는 사그라집니다. 그리고 작게 들려오는 종소리, 바람소리. 확실한 맺음 없이 공허한 풍경과 급작스레 마주치는 우리는 잠시간, (정념이 이입될) 대상을 상실하게 되어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정념들의 잔여가 해소되지 못하는 순간과 만나게 됩니다. 정념을 내부에서 순환시키기 보다는 외부로 개방시키는 전략을 택하는 것이지요.
살짝 길게 느껴지는 공백.([시와]를 감상하며, 우리는 시간이 잠시 정박된 것 같은 순간을 종종 만나게 되지요.) 건조한 드럼 필-인으로 바통을 이어받는 것은 <기차를 타고>입니다. "흐리게 보이는 초록의 산들과 산위의 구름과 초록의 논밭과 그 옆에 달리는 기차"라는 구절로 시작하여, 크게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같은 구절로 끝맺음하는 <기차를 타고>에서, 우리는 역시 중심을 명확히 가늠할 수 없지요. 시와의 시선은 풍경으로부터 내면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다시 풍경으로 돌아옵니다. 이는 시선의 자연스러운 순환운동처럼 보이는데, 이때의 시와는 인위적으로 시선을 하나의 대상으로 고정시키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종의 원운동. 전의 것으로부터 이어받은 정념의 잔여를 대부분 온전히 받아들인 <기차를 타고>는 입구와 동일하게 지어진 출구를 마련해놓음으로써 다시 한 번 개방의 포즈를 취합니다. 큰 맥락에서 <기차를 타고>는 가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지요.
[시와]에서 가장 큰 진폭을 가진 <사실, 난 아직>에 이르러 시와는 비로소 사운드의 텍스쳐를 겹겹이 쌓아가며 감정을 고조시키는, (비교적) 목적론적인 진행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이중구조를 가진 <사실, 난 아직>의 전반부만 해당되며, 앞서의 점층적 구조를 반전시키며 등장하는 후반부는 보다 자유로워진 구조와 선율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사의 흐름과도 일치하는데, 전반부가 "어쩜 비어있는 걸 들킬까봐"라며 불안해하는 나/시와의 형상화라면 후반부는 "당신의 따뜻한 그 말 한마디에" "위로"받는 나/시와를 보여주는 격이지요. 앞서의 <길상사에서>, <기차를 타고>에서 줄곧 결여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던 나/시와는 <사실, 난 아직>의 후반부에서야 "위로"를 받게 되는데, 그 "위로"란 [시와]에서의 마지막 트랙, >랄랄라>에서 구체적으로 표징됩니다.
4.
이쯤에서 잠시 멈추어 정리를. 주지하였듯 시와에게 풍경은 "아름다운 것", 곧 충만함 그 자체지요. 나/시와는 이 완전한 풍경으로부터 영원히, 유배당합니다. 근원적인 유배로부터 시와는 최소화된 사운드의 조율과 非팝-적인 구조라는 자신의 두 가지 핵심적인 방법론을 이끌어 냅니다. 이는 일종의 실마리지요. 시와는 분명 결여되었지만(감산의 방법론), 결코 오소영의 경우처럼 "부질없다"며 주저앉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와는 자기-완결적인 중심을 구축해내기를 포기하며, 대신 다시 외부로의 접속을 시도합니다.(非팝-적 구조) 시와는 줄곧 외부와의 흐름 속에서 사고하려 하는데, <길상사에서>부터 <랄랄라>까지 전제군주化된 팝의 야망은 어디서도 찾을 길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배된, 작은 사람들에 불과하지요. 결국 시와의 외부란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작은 사람들'의 세계입니다.(김현식의 [도시의 밤]이 듣고 싶어지는군요!)
가는 통기타의 울림으로 시작되는 <랄랄라>는 네 곡뿐인 싱글 [시와]의 마지막 노래이며, 가장 단출한 곡이기도 합니다.(사실 마지막까지, 통기타 하나로 연주된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답니다.) 희미한 시와의 목소리, 그리고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운 통기타의 핑거링이 만났을 때, 왠지 시와는 '나 자신'으로서 소유할 수 있는 마지막 특권, '자기 자신'마저 내려놓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묘한 기분 / 저기에 있었던 내가 보인다"는 노랫말은 명시적입니다. 나/시와는 둘이 되지요. 여기 있는 나/시와, 그리고 저기에 있었던 나/시와. 나/시와는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모순율의 부정. 저기에 있었던 나/시와는 나/시와이면서 동시에 나/시와가 아닌 무엇인가가 됩니다. 나/시와에게 비로소 나와 너의 구분은 사라집니다. 숭숭 구멍 난 경계의 틈새들로 나/시와인 것들과 나/시와가 아닌 것들은 극적으로 손을 뻗어, 이내 맞잡게 되는 것이지요!
"흐르는 물속에 세상이 비치네 / 내 얼굴도 비춰볼까-"
가장 작아진 나로서, 시와는 다시 풍경에 말을 겁니다. 자아와 타아가 하나의 흐름으로 엮여 들어가는 순간, 풍경 역시 그 절대적이었던 특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지상으로 내려온 풍경은 나와 훨씬 가까운 풍경입니다. 시와에게, 풍경은 무엇을 비추어 주었을까요? 4분 남짓한 시간동안 통기타 한 대와 목소리만으로 조곤조곤 연주되던 노래에, 그 마지막 반복구에서야 작은 단음의 신디사이저가 위로 살며시 포개집니다. 마치 풍경이 답문하듯.
5.
CD가 이내 멈춰갈 때 쯤, 여럿 미묘한 감정이 아직 가시질 않았는데 문득 책상 맡에 얹어놓은 [시와]의 재킷이 눈에 들어옵니다. 손으로 슥슥- 그린 그림에 대강 칠한 듯한 커버, 맨 위에 손글씨가 그답다- 는 생각을 들게 만듭니다. 뒤로 한번 돌려보니, 거기엔 성성하게- 역시 손글씨로 수록곡들의 제목이 쓰여 있습니다. 천천히 아래로 시선을 훑다 잠깐, <사실, 난 아직>에 작게 화살표가 가 있고 '노래중생'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네요. 노래중생, 노래하는 중생이라는 걸까요? 괜히 되뇌어 봅니다. 노래중생, 노래중생- 하고요.
다시 되돌아갑니다. [시와]의 말미에서 <랄랄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기능하기 위하여 [시와]에서 유일하게 완결적인 결말로 수렴되는 형상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중심이 될 반복구가 여전히 가냘픈 까닭에, 그것은 전제군주의 형상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작고, 미묘한 공명으로 들려오지요. 말하자면 그 공명은 시와의 결론 같은 것입니다. <화양연화>에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 때가 사라져가듯, 완전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다는 것, 그것은 [시와]를 관통하는 실재이며 진실입니다. 어쩌면 일종의 우울한 엔딩인 걸까요? 글쎄요. "흔들림 없는 눈빛과 목소리", "당신의 따뜻한 그 말 한마디"가 주는 "위로"라든지, "위안", "선물", "용기" 같은 것들.(<사실, 난 아직>) 공명은 우리들의 텅 빈 사이를 오가는 작은 진동 같은 것일 테지요. 혼자서는 모두 똑같이 작은 사람일 뿐, 약한 존재일 뿐이겠지만 나/너의 경계 없는 하나의 흐름으로서, '우리(공동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삶을 견디어 나갈 수 있을 것. 시와는 분명 낙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굳이 완전해질 필요는 없으나, 다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랄랄라>의 말미에서 조용히 울리는 시와의 목소리, 그리고 함께 노래하는 신디사이저는 말하자면 '우리'가 함께 불러나가는 긍정의 노래겠지요.
짧은 싱글, [시와]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랄랄라>의 결말이 소박할수록, 그녀가 제시하는 미래의 상도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하긴, 미래란 늘 불확실한 법이니까요. 그럼에도,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낙관의 끈을 잡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믿음이겠지요.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 대한 믿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라는 믿음. 우리는 좀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것.
여전히 먹먹한 밤, CD를 빼냅니다. 차분해지는 마음. CD를 케이스에 넣다가 괜히 또 눈이 가는 단어. 노래중생. 불가에 도통 연이 없는지라 무슨 뜻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요 위에 누워, 우리는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밤은 크고 무겁습니다. 불현듯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집니다. 머리보다는 손가락이 더 잘 외우고 있는 번호를 누르고서 잠시 기다립니다. 익숙한 컬러링, 괜히 설레는 마음에 입가엔 엷게- 미소가 번집니다. 어디선가 따듯한 바람이 후- 불어옵니다. (단편선/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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