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이발관 [가장 보통의 존재]
- Posted at 2008/08/30 00:00
- Filed under review/국내

가장 보통의 존재 (2008/55AM Music)
7.9
01. 가장 보통의 존재
02.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
03. 아름다운 것
04. 작은마음
05. 의외의 사실
06. 알리바이
07. 인생은 금물
08. 100년 동안의 진심
09. 나는
10. 산들산들
"읽기에 앞서, 언니네 이발관의 오래된 음반들을 꺼내어 먼지 한 번 털어주고 간만에 다시 한 번 들어주신 후에 읽기를 권합니다. 권장사항이에요."
0.
달뜨기 쉬운 상황일수록 침착해야 하는 법, 숨을 고르게 쉬도록-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마 이 글을 읽게 되는 수많은 분들의 손에는 이미 [가장 보통의 존재]가 들려있겠지요. 벌써 수십 번 플레이 시키신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저 역시, 그럴 가치 정도는 있는 음반이라 생각하고 있고요. 솔직히 기대를 하지는 않았어요(기대는 금물?). 전작 [순간을 믿어요]를 듣고서, 어떤 이들은 화사하고 명징한 기타 팝에 흠뻑 빠져 들었겠지만 또 (저를 포함했던) 많은 이들은 확고했던 그들에 대한 지지를 대번에 철회하기도 했었거든요. 때마침 비슷한 연배의 델리 스파이스(Deli Spice)가 연일 헛방망이만 때리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아, 한국 모던 록의 첫 번째 좋았던 시절도 이제는 모두 추억으로 잊혀지겠구나- 라며 한숨지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는, 그런 시절이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자잘한 걱정들은 당분간 접어두시길, 왕년의 이발사들은 화려한 귀환을 선포했습니다. 그 사이에 멤버 탈퇴와 재가입 등,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4년이 지났어도 전혀 죽지 않은 이석원 특유의 자뻑 기질 강한 멘트들과 함께 언니네 이발관은, 그렇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왔습니다(자뻑도 언니네 이발관 나름의 특별한 매력이 될 수 있을까요?). 아울러 [순간을 믿어요]의 발매와 동시에 이탈했던 꽤나 많은 수의 '올드' 팬들도 다시 복귀를 선언하는 이색적인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지요. 넷 상에서는 이미 2008년의 여름을 평정하다시피 한 그들의 다섯 번째 정규작, [가장 보통의 존재]. 언니네 이발관의 신보가 과연 그들 제 2의(혹은 제 3의) 전성기를 여는 키(key)가 될 수 있을까요? 기대감이나 반가움 같은, 여럿 감정들이 교차되는 가운데- 하지만 그 전에 잠시만. 음반을 마주하기에 앞서, 우리는 언니네 이발관에 대한 케케묵은 통념을 하나 깨고서 가야할 것 같네요.
1. 오래된 편견
어떤 매체에 개제되었는지를 막론하고서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에 대한 비평적인 소개가 곁들여진 글에서라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쉽게 언니네 이발관의 '멜로디'에 대한 언급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그들의 멜로디)를 꾸며주는 수사로서 '팝적'이라는 단어를 종종 발견할 수 있고요(고로, 합치면 '팝적인 멜로디'가 됩니다). 작금의 대중음악비평언어에서 '팝적인 멜로디'라는 것이 '유려한 멜로디', '아름다운 멜로디'와 거의 동일한 기의를 표하고 있다는 차원에서, 저 역시 언니네 이발관이 '팝적인 멜로디'를 선보인다는 이전의 비평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그와는 별도로, '팝적인 멜로디'는 교정되어야 하는 표현이라 생각하고 있지만요). 확실히, 언니네 이발관에게 있어 멜로디는 그들 음악의 가장 확고한 버팀목이지요.
그렇지만 '팝적인 멜로디'가 음악에서의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근거로 하여 '팝송'을 연주하는 모던록 밴드로서 언니네 이발관을 규정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관점에서라면 '팝송'과 '팝적인 멜로디'란 그렇게 자동적으로, 손쉽게 연결될만한 것이 아니거든요. '팝적인 멜로디'는 어떤 질료(質料)지만 '팝송'은 그러한 질료들이 일정한 형식/구조 안으로 기입된 결과물. '팝적인 멜로디'에서 '팝송'으로 이행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팝'이라는 규격에 따라 질료를 형식화/구조화 시키는 공정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언니네 이발관을 괜찮은 '팝송'을 연주하는 모던록 밴드로서 규정지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팝적인 멜로디'가 핵심적인 질료라는 사실 외에도, 그들의 질료가 '팝'의 규격에 따라 형식화/구조화 되어있다는 사실 역시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언니네 이발관이 이전까지 보유해 온 바이오그래피, [비둘기는 하늘의 쥐], [후일담], [꿈의 팝송], [순간을 믿어요]를 분석했을 때의 제 결론은: 그들이 한결같이 명백한 의미에서의 '팝송'을 연주해온 것은(혹은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 이었답니다. 또한 이를 토대로 저는 그들의 바이오그래피를 두 갈래의 경향으로 구분할 수 있었지요. [비둘기는 하늘의 쥐]와 [후일담]으로 이루어진 한 축, 그리고 [꿈의 팝송], [순간을 믿어요]의 또 다른 한 축. 90년대의 음반,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음반이라는 단순한 시기(時期)적인 구분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지요. 저는 언니네 이발관 내부에서의 '주도권' 경쟁에 포커스를 맞추고자 합니다.
언니네 이발관의 세 번째 음반, [꿈의 팝송]이 발매될 당시 언니네 이발관의 실질적인 '실세' 이석원은 웹진 가슴(www.gaseum.co.kr)과의 한 인터뷰에서 [후일담]까지 함께했던 정대욱의 기타 플레이에 대하여 '자신이 멜로디를 부르는 동안에도 기타는 여전히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인터뷰 상에서의 짧은 언급에 불과했지만 이는 멜로디를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지적일 수 있거든요. 또한 이석원은 [후일담]의 <순수함이라곤 없는 정>에 대하여 자신의 멜로디가 나오는 동안 정대욱 역시 기타 멜로디를 연주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음반에 수록된 버젼은 기타를 3~4 트랙씩이나 '들어낸' 것이라는 언급을 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정대욱의 기타 플레이가 일정한 '통제'를 필요로 했다는 말이에요(같은 인터뷰에서 이석원이 정대욱을 '이혼한 부인'에 비유하는 대목은 흥미롭습니다. '이혼한 부인'이란 '애증의 관계'의 다른 말이니까요).
이석원의 언급을 절대 허투루 받아들여서는 아니 됩니다. [후일담]의 첫 트랙, <유리>만 들어보더라도 그의 언급은 완벽히 사실인걸요. 정대욱은 이석원이 보컬 멜로디를 부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기타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컬 멜로디를 서브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느냐, 전혀 아니에요. 모던 록치고는 꽤나 단단한 베이스 라인과 안정적인 드러밍 위에서, 그 둘은 타협 없이 그저 자신의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는 통상적인 팝의 공식을 훌륭하게 배반해 버립니다(제가 일전에 쓴 시와의 싱글, [시와]에 대한 리뷰에 '팝'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를). 그렇다고 그들의 음악이 팝적인 형식/구조에서 벗어나기를 의도했는가, 보면 그것도 아니에요. 이석원과 정대욱이 양보 없이, 서로가 '중심'을 취하려했다는 해석이 타당합니다. 즉, 이석원과 정대욱이라는 두 개의 중심(이 되려는 욕망)이 생성된 것이었습니다(전반적으로 이석원의 판정승이기는 합니다만-). 두 개의 중심이 내뿜는 각각의 인력(引力). 이석원-정대욱 체제의 언니네 이발관이 연주한 음악들에서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은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 고로 [후일담]은 여러 의미에서 '날' 선 음반이 되었지요. 이석원에 따르면 첫 음반이었던 [비둘기는 하늘의 쥐]를 작업할 당시에는 꽤나 큰 나이 차이(정대욱의 나이는 당시 중3!)를 이용하여 정대욱을 쉽게 통제했다 하지만 음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석원은 팝의 규격을 완벽히 숙지할 수 없었던 듯, [비둘기는 하늘의 쥐]에서도 이러한 긴장은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습니다(<푸훗>으로부터 <보여줄 수 없겠지>까지, 한국 모던 록 씬의 시작을 알린 그 유명한 첫 부분만을 재생해보아도!). 비문(非文)투성이의 첫 음반,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경이로웠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기도 하지요. [후일담]의 매력 역시, 완벽한 팝의 현현(顯顯) 같은 이상적인 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두 개의 중심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 상태, 그리고 (그렇기에) 종종 위태로워지던 그들의 불안한 팝송이 이석원-정대욱 체제의 주요 키워드,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후일담] 이후 정대욱과 이별을 고하고서, [꿈의 팝송]을 기점으로 새로 시작된 두 번째 언니네 이발관은 기존의 이석원에 새로운 기타리스트을 더하여, 이렇게 이석원-이능룡의 상호견제적 체제가 아닌 이석원이 홀로 전반적인 음악적 판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력한 '이석원 독재체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순간을 믿어요]에 수록된 이능룡-정무진 듀오의 연주곡 <셋넷>이나 정무진의 <키다리 아저씨>등을 예로 들며 반박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트랙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생색- <셋넷>은 메이저한 마켓을 지향하는 그들의 음반에 하나쯤 '요구'되던 예쁜 기능성 연주곡에 다름 아니었으며, <키다리 아저씨>는 전체적인 밸런스와 크게 어긋나는 불행한 트랙이었습니다. 이석원 역시 다른 이의 곡에는 크게 왈가왈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존중'이라기보다는 '무관심'에 더욱 가깝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드네요. 어차피 주력은 자신의 곡이었음을 그는 스스로 잘 알았으니까요.
한편, 상대적으로 온순한 플레이를 펼치는 이능룡으로 말미암아 이석원은 그토록 욕망하던 '하나의 중심'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이석원은 (윗부분에서 언급했던 것과 동일한) 웹진 가슴과의 인터뷰에서 '중앙의 팝송'에 대한 욕구를 강력하게 어필한 바 있으며, 발매 전 그의 일기에서는 "언니네 이발관의 멜로디는 절대 돌려 말하지 않을 거여요. 첫 곡, 첫 음부터 확실히 찔러드릴 거여요."라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지칭하는 멜로디란 어디까지나 보컬 멜로디, 곧 자신의 멜로디지요. 하나의 중심이라는 팝의 조건을 만족한 뒤, 이석원은 <2002년의 시간들>이나 <나를 잊었나요?> 같은 질 좋은 '팝송'을 곧잘 생산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직조된 것이 [꿈의 팝송]과 [순간을 믿어요]. 비록 비평적인 측면에서 이 두 음반의 명암은 극명하게 갈렸다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지향(중앙의 팝송)을 추구한 결과들이었지요.
2. 가능한 변화들
외견상으로는 그나마 안정적으로 보이던 두 번째 체제 역시 2004년, [순간을 믿어요]의 발매 이후 베이시스트 정무진의 탈퇴로 인하여 와해되게 됩니다. 별 수 없이 언니네 이발관은 다시 긴 휴지기로 접어들어야 했지요. 그 4년 동안 언니네 이발관(그리고 이석원)을 둘러 싼 가십성 뉴스들이야 꽤나 많았지만 그에 대한 논평들은 생략하고요, 중요한 것은 [가장 보통의 존재]의 발매- 우리들이 관심 가져야 할 유일한 사실은, 어찌되었든 [가장 보통의 존재]가 언니네 이발관이 연주해왔던 그간의 디스코그래피와는 무엇인가 '다른' 양태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변화의 주역은, 예상했듯 이석원과 그의 멜로디입니다.
앞서의 단락들에서 지적했던 대로 이석원은 [순간을 믿어요]를 작업하던 시기까지 자신의 멜로디를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시키는 데 몰두해왔습니다. 그의 최종 목표는 '중앙의 팝송'.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는 환상의 훅(hook)을 만들어내야 했지요. 자연히 구조란 단순해지고 모든 공력은 한 방의 훅으로 집중되기 마련(<순간을 믿어요>에서의 방식이 그들에게 적합했는지, 그렇지 아니했는지를 떠나 "I saw your something"의 한 방이 뇌리에 남는 종류의 것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러나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이석원은, 경위야 어떻든 간에 그간의 작법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대안을 모색하는데, 그 중에서도 멜로디에 전에 없던 다양한 서사(narrative) 구조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먼저 눈에 띕니다.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의 첫 번째 트랙인(그리고 표제곡이기도 한) <가장 보통의 존재>는 이러한 이석원의 의도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트랙이지요. "이런 이런 큰일이다. 너를 마음에 둔 게."라는 순환되는 후렴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멜로디의 흐름이 이러한 하나의 중심으로 향해있는 것은 아닙니다. 트레이드마크 격인 청승맞은 가사는 전에 비해 곱절은 길게 늘려져있고 반복적인 기타리듬 위로 이석원의 목소리가 제시하는 몇 가지의 모티브가 지속적으로 변주되며 공간을 채워나갑니다. 기타를 포함한 악기 전체가 하나의 모티브로부터 파생된 음률을 연주하고 있음에 비하여 이석원의 목소리가 유독 다양한 모티브를 취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지요. 뚜렷하고 고정된 형상의 훅을 중심으로 곡 전체가 구조화 되어있던 [꿈의 팝송], [순간을 믿어요] 시절의 작법과는 분명 대조적인 대목이에요. 그간의 언니네 이발관은 훅을 강조하기 위하여 (A-B-C순의 통상적인 팝적 구조에서) B를 생략하고 바로 C(훅이 등장하는 부분)로 넘어가는 구조를 차용했으며, 때로는 모든 구조를 생략하고 C만을 반복하는 등, 최대한도로 간결한 구조를 지향했습니다. 이는 명쾌하기는 했지만 워낙에 직선적이었던 탓에 감정의 미세한 결을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한 면이 있었지요. 그에 비하자면 이석원의 새로운 작법은 특정 정서(언니네 이발관의 경우, 청승이겠지요?)의 고양이라는 '목적'을 향해 무작정 나아가기보다는 그 '과정'에서의 복잡 미묘한 감정의 상승/하강을 주목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비-직선적인 멜로디, 곡선화한 멜로디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작법 상의 변화에 발맞추어, 이석원의 보컬도 전보다 드라마틱해짐이 돋보입니다. 목소리의 톤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결코 표현력 좋은 보컬이라 볼 수 없었던 이석원은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비로소 만개하는 목소리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나 <가장 보통의 존재>와 <의외의 사실>에서 두드러지는 팔세토의 적극적인 활용은 '보컬리스트'로서의 이석원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어내는 좋은 근거가 됩니다. 때로는 새로운 지향을 달성하기 위한 보충물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하는데, 가령 싱글 커트 된 <아름다운 것>은 다른 트랙들에 비하여 비교적 훅의 비중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훅 이외의 부분에서의 효과적인 완급 조절로 전작들에도 존재했던 비슷한 구조의 '팝송'들보다도 조금 더 세심하게 흐름을 배려하고 있음이 돋보입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것이지요. 또한 다양해진 목소리의 표정들, 이를테면 <아름다운 것>과 <나는>에서 느껴지는 진솔함, 그와 대조되는 <알리바이>의 뾰루퉁함, <인생은 금물>에서의 나긋한 목소리까지- 이석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채로운 표정으로 [가장 보통의 존재]를 한 음 한 음,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이석원의 새로운 지향은 <가장 보통의 존재>부터 <의외의 사실>까지, 초반의 다섯 트랙에서 가장 공세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살펴보았듯, 그의 새로운 지향은 '팝'적인 구조/평식의 규격들과 꼭 들어맞고 있지는 않고요. (한국의 모던 록 씬에서) 공공연하게 가장 훌륭한 멜로디 메이커 중 한 명으로 대접받고 있는 이석원은 그가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인 (제가 선호하는 용어는 아닙니다만) '팝적인 멜로디를 더욱 유연성 넘치게 활용하면서, 대신 기존의 형식/구조를 탈피하려는 전략으로서 스탠다드한 '팝송'들의 목적과는 다른 지점으로의 도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였을까요? 이석원은 신보의 작업이 마무리 되어 가는 와중 네이버와 가졌던 한 인터뷰에서 [가장 보통의 존재]를 '음악생활의 여정에 있어 거의 첫 번째 앨범'이나 다름없이 여기고 있다는 감회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의 언표들이 특유의 나르시시즘으로 인하여 빈번하게 리스너들 사이에 회자되고는 하지만, 이는 그 중에서도 높은 강도. 비록 다소곳한 뉘앙스지만, 이석원은 자신이 작업한 이전의 바이오그래피를 치열한 작가주의 정신이 없던 상태에서 만드러 낸 '범작' 정도로 치부함으로써 [가장 보통의 존재]의 성취를 부각시키려 하거든요. 과연? 언니네 이발관의 최신작, [가장 보통의 존재]는 그들이 지금까지 발표했던 네 장의 바이오그래피와 질적으로 확연한 수준 차이를 들려주는, 다른 차원의 범주에 놓아도 될 소위 명반- 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의중은 '그렇게 될 것' 보다는 '그렇게 되지만은 않을 것' 쪽으로 기우는 걸요. 언니네 이발관은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주지만, 이를 '결정적인' 국면의 전환이라 보기에는 아직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많아요. 외양으로는 진보적이지만- 맞아요, 언니네 이발관은 꼭 그만큼 보수적이기도 하니까.
3. '중앙의 팝송'과 아이러니의 전략
역시나 언니네 이발관에 대한 비평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는 그들의 '노랫말'. 우리는 그것을 이석원의 목소리, 기타 사운드 등과 같은 질료들과 동등한 위치의,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질료'로서 파악하여야 합니다(잠시 부연하자면, 굳이 이를 특권화 시킬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단지 음악을 구성하는 하나의 질료일 뿐인 노랫말이 실질적으로 과도하게 특권화 되고 있다는 점은 기존의 클리셰한 한국 대중가요들에 대한 중요한 비판점 중 하나 아닐까요?). 노랫말이란 질료는 그 특성상 악기 연주와 같은 추상적인 질료들보다는 비교적 구체적인 형상에 가깝기에, 일정 정도 이상의 수준만 갖춘다면 보다 손쉽게 음악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수단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지요. 언니네 이발관은 초창기부터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미학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노랫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습니다. 언니네 이발관의 미학적 목표, 우리는 그것을 '청승'이라 이야기해왔지요. 그러한 목표 자체의 변동이야 없겠습니다만, 그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내놓은 전략이란 개별 바이오그래피마다 차이날 수 있는 법. 편의상 결론부터 말하자면, 줄곧 '청승'을 지향하던 언니네 이발관이 초창기에 중점을 두었던 전략은 '아이러니', 반어와 모순입니다.
초기 언니네 이발관의 수많은 노래들이 동일한 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겠지만, 대표적인 트랙으로 <순수함이라곤 없는 정>을 들 수 있겠습니다. "만일에 내가 너에게 고백한다면 들어줄 사람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아요"라는 (사실은 무척) '암울한' 내용의 노랫말이 이석원의 맑디맑은 목소리에 실리게 되었을 때의 그 절묘한 간극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지요. 거기다 정대욱의 기타는 또한 새끼강아지 마냥 제멋대로 짤랑짤랑 뛰어다니고요. "지금부터 우리는 유리 너를 볼 수가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유리>)와 함께 울리는 경쾌한 드러밍도, <보여줄 순 없겠지>의 수줍은 기타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울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배어 나오는 것을 어쩌지요? 일종의 낯설게-하기. 하긴, 언니네 이발관은 그들의 데뷔 음반에부터 [비둘기는 하늘의 쥐]라는 이상한 제목을 달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청승맞은 사랑의 종지부를 그저 시니컬한 웃음만으로 견뎌내던 그들의 속내는 오히려 깊었겠지요(마치 주성치의 영화들이 그렇듯!). 우리들은 그런 언니네 이발관을 좋아했고요. 이 땅의 수많은 모던 록 소년소녀들에게,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언니네 이발관의 청승맞은 노래들이었지요. 그렇기에 [순간을 믿어요]에 실망했던 이들이 많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희극을 정말 희극적으로, 비극을 정말 비극적으로 (그것도 무척이나 격양되어) 노래하던 언니네 이발관은 우리가 알던 그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아이러니가 본디 정합적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석원이 [꿈의 팝송]부터 강하게 '중앙의 팝송'을 지지해왔다는 것 역시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전의 제 글에서 저는 팝의 자기-완결적 의지라는 개념에 대하여 이러한 부연을 덧붙인 적이 있습니다: "내부의 모순은 적거나,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내적으로 순환되어야 합니다. 시작은 중심을 향해 말려있고, 끝도 역시 중심을 향해 말려있지요."(시와의 [시와] 리뷰 中) 요컨대, 팝이라는 구조가 자신에서 시작하여 자신으로 종결되는, 폐쇄적이며 정합적인 구조임을 지적했던 것이지요. 이석원이 이야기하던 중앙(center)의 팝송이란 다름 아닌 메이저한 팝송- 정대욱이 부재한 후 [꿈의 팝송]에서 이석원은 일차적으로 노랫말을 제외한 나머지 질료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통합시키는 작업을 수행하였으며, [순간을 믿어요]에서는 더 나아가 노랫말까지도 통합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순간을 믿어요]의 사운드가 강력해질 수밖에 없던 것은, 모든 질료들이 하나의 일치된 목표를 향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특유의 아이러니가 설 자리를 점차로 잃어가는 것은 당연지사. 첫 번째 체제에서 채택되었던 아이러니의 전략은 두 번째 체제에서 그 힘을 점차로 잃었지요. 낯설게-하기는 실종되었으며, 그들의 노래가 '메이저'해지는 대신 넌지시 건네오던 위로의 깊이는 얕아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가장 보통의 존재]로 돌아와서. 앞서의 문단들에서 저는 이석원이 스스로를 옭아맸던 '중앙의 팝송'이라는 관념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의 [가장 보통의 존재]를 읽어내려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장 보통의 존재]가 풀어내지 못한 한계점들에 대하여 읽어내고자 합니다.
4. 양가적 욕망
이석원이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새로운(대안적인) 작법을 시도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요. 그것이 일정 부분 전형적인 '팝송'의 규격을 넘어서려는 시도임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가장 보통의 존재]가 언니네 이발관에게 '중앙의 팝송'을 대체하는 다른 생산적/창조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사실 의문입니다. 음반을 듣다보면, 도리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가장 보통의 존재]가 표면적으로는 강박을 벗어던진 듯 보일지 몰라도, 그 내부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강박적으로 확고한 하나의 중심을 향하고 있는 걸요.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의 미니멀한 연주는 상징적입니다. 이석원의 목소리는 다채로운 표정을 연기하고 있지만, 그것을 한 꺼풀 벗겨 내자면 단조로운 모노톤의 사운드가 기다리고 있지요. 시종 강박적인 디스코 리듬 위로 전자 기타는 절제된 플레이를 선보입니다. 허나 이는 굳이 좋게 표현한 것, 실상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에서 소규모 편성 특유의 공간감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발언권만이 제한되고 있을 뿐. 극도로 약화된 악기들의 발언권 위로 이석원의 목소리가 모든 서사를 이끌어 나가지요. 목소리라는 질료와 그 외의 질료 사이에는 명백한 위계질서가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서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트랙은 <가장 보통의 존재>인데, 이 곡에서 목소리 외의 질료들은 그저 일종의 '대상', 혹은 '풍경' 정도로만 치부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적인 예로서, 트랙의 말미에 목소리 외의 질료들은 모두 왜곡되면서 멀찍이- 달아나는 것처럼 그려지지요. 소통이라든지, 소외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이러한 종류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전략 정도로 이해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한 처리가 효과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목소리 외의 질료들이 무조건적으로 정적인, 표정 없는 형상을 띠고 있으란 법은 없지 않을까요? 불행히도 이석원은 이를 캐치하지 못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석원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의 역량 역시 백분 발휘되기 쉽지 않은 구조입니다. 그래서 가끔 [가장 보통의 존재]는 이석원의 솔로 음반처럼 들려오기도 합니다. '팝송'의 규격을 넘어서려던 이석원의 새로운 시도는 그래서 결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중앙의 팝송'이란 그토록 강력한 것! 이석원은 하나의 중심으로 귀결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하나의 중심으로 기능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고 있지요. 즉, 스스로도 갈팡질팡하는 형국. 이러한 양가적인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한 내적인 갈등은 [가장 보통의 존재] 전반에 걸쳐 작동하고 있으며 개별 곡에 따라 양상은 다소간 차이를 보입니다만, 최소한 <의외의 사실> 전까지의 초반부 트랙들을 듣고 있노라면 '밴드'로서의 언니네 이발관에 대하여 조금 회의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초반부의 연주들은 '의미'를 부여받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질료들이지, 직접적으로 청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적극적인 '표현'에까지는 다다르지 못하지요. 아마 이석원의 멜로디가 조금이라고 별로였다면 금세 무너졌을 것을, 이석원의 송라이팅이 예전부터 출중한 편이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고민스러웠던 전반부를 지나 음반의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가장 가까웠던 과거의 언니네 이발관- '중앙의 팝송'을 노래하던 언니네 이발관의 모습입니다. 이석원 역시 이때만큼은 야심차게 제시했던 자신의 새로운 방법론을 잠시 접어두고서 사심 없는 척- '팝송'을 부르고 있는데, 재미있게도 이런 '팝송' 트랙- 특히 <인생은 금물>의 경우에는 정말 발군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서사 구조, 비-직선적인 멜로디 등 이석원이 본작에서 특별하게 염두에 두고 있던 요소들은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있으나 향상된 표현력만은 그대로고,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어떤 '강박'들을 떨쳐내고 편하게 만들어낸 듯 발언권의 문제에서도 다른 질료들에게 백배 양보한 양상입니다. 가장 생기 넘치는 연주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에요(초반부의 마냥 건조한 연주들이 더욱 아쉬워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법 상에서 기존의 것을 정확히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평까지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노래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산들산들>이 마지막 트랙을 장식하고 있음은 무척이나 아쉬운 지점입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 / 소나기 두렵지 않아 / 구름 위를 날아 어디든지 가 / 외로워도 웃음 지을 수 있는 곳이면 / 어디든 가고 싶네 / 그게 나의 길"이라며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노래하는 이 곡은, 하지만 이석원이 어렵사리 제시했던 초반부에서의 새로운 작법과는 동 떨어져 역시나 기존의 것을 좇고 있을 뿐입니다. 기세가 한풀 꺾인 것 같아서- 안타까웠지요. 저는 언니네 이발관이 [가장 보통의 존재]를 미래지향적인 긍정적인 메시지로 마감하기 위해서라면, 다시 한 번 '새로운' 비전을 강하게 어필할 필요성이 있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나아가기'보다는 '일단 멈춤'에 가까웠고요. 단순한 취향의 차이일지, 그 이상의 정치적인 차이일지는, 개별 리스너들에 따라 해석하기 나름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저는 조금 더 래디컬한 관점을 유지하려는 것이고요.
5. 전망들
짧지 않은 호흡으로 언니네 이발관의 현재까지를 살폈습니다. [가장 보통의 존재]를 저는, 그들이 보여주는 일정한 성취만큼이나 아쉬움을 간지하고 있는 음반으로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요. 양날의 검- 이석원의 양가적인 욕망은 종종 서로의 발목을 잡으며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는 음반을 미리 어느 정도의 선까지로 한계지어 버립니다. 두 극단적인 욕망 모두에게 위배되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는 움직임이 자주 관찰되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좋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석원-정대욱 체제에서의 긴장 관계가 생산적인 쪽이었다면, 이석원의 양가적 욕망으로 인한 (내면적인) 긴장 관계는 그 반대로, 훨씬 비-생산적으로 보이거든요. 어느 것 하나를 쉽사리 선택하지 못하는 이성원의 태도로 인하여, 이석원에 속한 질료들은 나머지 질료들과 진정으로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석원이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를 운영함에 있어 한번쯤 다시 처음부터 고민해야 될 문제가 아닐까요? 아무렴, 물꼬를 터야겠지요. 이석원이 선보인 새로운 작법이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밴드'로서 충분히 고려되었을 때, 언니네 이발관은 비로소 '실질적인 첫 번째 앨범' 같은 수사를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몇몇 아쉬움과는 별도로, [가장 보통의 존재]는 언니네 이발관의 역동적인 현재에 대한 가장 솔직한 보고서이기도 합니다. 비록 앞의 단락들에서 그들의 흠결을 상세히 짚기는 했으나 개중에는 괄목할 말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드물게 질료들간의 환상적인 배합을 자랑하는 <의외의 사실>이 현재의 언니네 이발관이 연주할 수 있는 최고의 싱글임은 물론 그간의 바이오그래피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함에는 대부분 이견 없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며, 그에 이어지는 시니컬한 <알리바이> 역시 레트로한 것이 꽤나 매력적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인생은 금물>도 [꿈의 팝송]에서의 엣센스만을 모아놓은 듯한 달달함으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고요. 이석원의 멜로디 감각은 ([순간을 믿어요]를 제외하자면) 어디서나 평균 이상은 하고도 남았던 바, 송라이팅은 역시나- 훌륭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즉, [가장 보통의 존재]가 기본적으로 훌륭하게 직조된 음반임은 그다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이야이에요. 그러나 언니네 이발관이 누군가요? 델리 스파이스, 마이 언트 메리(My Aunt Mary), 미선이와 함께 천하(?)를 나누어가졌던 1세대 모던 록 씬의 맹주. [비둘기는 하늘의 쥐]의 그 경이로운 첫 걸음을 기억하고 있기에, 우리는 언니네 이발관에게 늘 (통상보다) 높은 기대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훌륭한 음반임에도 조금 아쉽다, 라는 정도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리스너로서 좋아하는 뮤지션에게 거는 기대만큼 순수한 것도 드물 테니. 그런 고로, 제 바람이라면 언니네 이발관의 다음 행보가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의 성취와 아쉬움을 토대 삼아 다시 한 번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경이로운 순간을 제공해주기를. 언니네 이발관이기 때문에, 이런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에요.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언니네 이발관이 지금처럼만 치열하게 노래한다면야, 언젠가는 자연히 도달할 경지 아니겠나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아마 그때가 온다면, [가장 보통의 존재]에서 느꼈던 조그마한 아쉬움들이 결코 불필요했던 과정에 불과했다 생각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편선/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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